`방송인의 영원한 사표(師表)’로 불리는 외길 방송인 11인이 `방송인 사이버 명예의 전당’에 수록되는 영예를 안았다.
한국방송진흥원은 지난 99년부터 광범위한 자료 조사와 의견 수렴절차를 거쳐 이혜구(李惠求.93) 노정팔(盧正八.82) 한기선(韓基善.83) 이인관(李寅觀.88) 송영호(宋永浩) 이계원(李啓元) 윤길구(尹吉九) 성기석(成基錫) 한덕봉(韓德奉) 김희창(金熙昌) 최요안(崔要安.이상 작고)씨 11인을 `참 방송인’으로 선정하고 방송진흥원 인터넷 홈페이지(www.kbi.re.kr)에 개설한 `방송인 명예의 전당’코너에 이들의 공적을 올리기로 했다.
`참 방송인’으로 선정된 11인은 우리나라에서 첫 방송이 시작된 1927년부터 CBS개국전인 1954년까지의 단일방송 시기에 현업에 종사했던 방송 1세대다. 방송진흥원은 이들 원로 방송인의 공적과 명예를 통해 한국방송사를 재조명해 본다는 취지로 사이버공간에 이들을 위한 명예의 전당 코너를 개설했다.
이혜구씨는 우리나라 방송의 개척자이자 초창기 방송의 산증인으로 통하는 최고원로. 1932년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채 1년도 안돼 음악.연예분야의 프로듀서로 전직해 방송활동을 하면서 국악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그 분야의 최고연구자가 됐다. 방송인으로 출발해 서울대 교수, 예술원회원을 거쳤다.
노정팔씨는 1945년 서울중앙방송국 PD로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1950년대까지 방송현장의 실무뿐만 아니라 중간관리자로 방송계 발전에 정열을 쏟았다. 1988년 방송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KBS이사장을 맡아 방송계에 복귀해 공영방송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한기선씨는 방송기술인 가운데 최고의 음향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39년 경성방송국 엔지니어로 입사한 이래 1948년 정부수립후 서울중앙방송국 중계책임자가 돼 당시의 열악한 기술환경 극복에 주력했다.
이인관씨는 한국방송의 `기술장관’이란 별칭을 얻었을 정도로 방송기술을 선도해온 인물. 1937년 조선방송협회 기술부에 입사, 방송계와 인연을 맺은 이래 이리방송국 개국당시 시설책임자를 거쳐 체신부 무선기술과장, 공보처 기술담당관을 지낸 뒤 한국방송공사 초대 기술이사(기술총국장 겸임)를 6년간 역임했다.
이들 4인 외에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기술인으로 50년 납북된 한덕봉, 아나운서의 대부로 통하는 이계원, 방송편성 분야의 개척자 송영호, 야구중계방송을 처음 도입한 윤길구, 일제말 임시정부 활약상을 소개하는 해외 단파방송을 청취해 국내에 전달한 이른바 `단파방송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성기석, 라디오 시대의 대표적인 방송드라마 작가인 김희창, 해방후 서울중앙방송국 전속작가로 활동한 최요안씨 등 7인은 이미 작고했다.
한편 이들을 위한 `제1회 방송인 사이버 명예의 전당 헌정식’은 한국방송진흥원 주최로 오는 15일 방송회관 3층에서 `인물로 통해 본 한국 초기방송사’란 주제의 기념세미나에 이어 열린다.
(서울=연합뉴스) 이명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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