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한인 이민 100주년을 앞두고 지난 100년 간의 한인 이민사를 기념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전국적으로 이미 8개의 지역 사업회가 구성됐고 하와이의 경우는 170만 달러의 거금을 모으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1903년 조각배를 타고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미국에 첫 발을 디딘 선조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비록 작고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그것이 200만을 헤아리는 미주 한인사회의 초석이 되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땅을 처음 밟은 한국인은 그들이 아니다. 그들이 오기 20년 전부터 한국의 선각자들은 서구를 배우기 위해 태평양을 건넜다. 그 중 하나가 유길준이다. 1883년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하는 고종의 특별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온 그는 미국을 더 배우기 위해 일행과 떨어져 보스턴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서유견문’을 써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서양의 선진문물을 소개한 그는 최초의 한국 유학생이기도 하다.
2년 후인 1885년에는 조선의 근대화를 꿈꾸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서재필이 망명해와 워싱턴 대학에서 고학을 하며 한국 최초의 서양의 자격증 따냈고 1902년에는 도산 안창호가, 그 2년 뒤에는 이승만이 미국에 왔다. 유길준이 살던 보스턴이나 서재필이 활동하던 필라델피아 등 미국 각지에는 선조들의 피땀이 어린 곳이 하나 둘이 아님에도 정작 그 뒤를 이어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에 무심한 때가 많다.
뉴잉글랜드 최고 박물관의 하나인 피바디 에섹스 뮤지엄이 2003년 유길준 한국 문화 예술관을 연다고 한다. 미 주요 미술관이 한국인 이름을 붙인 박물관을 개관하는 것은 처음이다. 미주 한인들도 별 관심이 없는 유길준이라는 이름을 미국 박물관이 먼저 기린다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부끄럽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고쳐나가며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옛일을 기억조차 못한다면 반성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유길준 한국관 개관이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물론이고 미주 한인 모두가 한국의 근대화와 독립에 몸바친 선조들의 노고와 열정을 기억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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