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서 자영업을 하는 40대 중반 여성독자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서 얼마전 만났다. 입을 여는 순간 솟구쳐 오르는 울분으로 목소리가 격앙된 그 주부의 문제는 남편의 ‘상습적 바람기’였다. 결혼생활 20여년동안 잊을만 하면 한번씩 터져 나와 여러번 결혼을 위기로 몰았던 ‘그 문제’가 연초 다시 확인되어서 새해를 배신감과 분노로 맞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그런 개인적 문제를 신문기자인 내게 털어놓는 이유는 “이런 일로 고통받는 여성들이 나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남편에게 우선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LA에서 가정 지키며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그는 하소연했다.
옷가게, 식당, 꽃집, 미용실…대부분의 한인 이민1세 자영업들이 성격상 여성이 앞에 나서야 하는 일들이라는 점을 그는 지적했다. 남성들은 물품 구매나 은행일을 담당하는 데 그런 일은 대개 아침 나절이면 끝나고, 그 시간 많은 남성들에게 LA 한인사회는 너무 유혹이 많다고 그 주부는 분개했다.
“남자들이 시간이 남아 도는게 문제예요. 아내는 죽도록 일만 하고 남편은 할 일 없이 놀러다니는 게 많은 자영업 부부의 현실이에요”
마켓, 리커스토어, 세탁소등의 업종에서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잡고 나면 비즈니스는 아내들 몫이 되고 남편들은 무슨 단체 일이다, 골프 대회다 하며 밖으로만 돌아다닌다는 지적은 전에부터 있어 왔다.
그 많은 시간들, 그리고 직업을 통해 성취감을 맛볼수 없는 데 따른 공허함, 좌절감이 이민사회 남성 탈선의 중요한 요인이 되어 왔고, 그것이 종종 가정파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LA 카운티의 경우 하루 평균 2쌍 정도의 한인부부가 이혼소송을 제기하고, 그들중 대부분은 40대, 50대 중년이다. 가정이 깨어지는 것, 특히 20-30년 같이 살아온 중년의 부부가 갈라서는 것은 여성들의 태도변화와 많은 상관이 있다고 본다. “이혼하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던 여성들이 나이를 먹으며 “더 이상 참고 살지 않겠다”로 생각이 바뀌고 있다. 여성에게 경제력이 있고 자녀들이 대학 갈 만큼 자란 경우는 특히 그렇다. 남편의 ‘여자 문제’를 내게 털어놓은 그 주부도 말했다.
“30대에 같은 문제가 터졌을 때는 어린 자식들 데리고 어떻게든 참으며 살아야지 했어요. 그런데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 과연 그렇게 참으며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회의가 들어요. 남편이 도무지 변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친구가 바람둥이 남편과 이혼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40대후반의 한 주부도 말했다. “젊어서는 이혼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친구가 긴긴 세월을 속 썩다가 이혼한후 홀가분해 하는 것을 보니 경우에 따라서는 헤어지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든 가정은 지키고 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여성들도 “만약 딸이 그런 처지라면” 하고 물으면 모두 대답이 같다.“딸이 사위의 못된 행실로 속을 썩는다면 참고 살라고 말하지 않겠다. 헤어져서 당당하게 자기 삶을 살라고 하겠다”는 것이 이야기를 나눠본 중년 주부들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이혼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가정’과 관련해서 그동안 남성들은 무임승차를 한 측면이 없지 않다. 남성은 밖에서 일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은 가정을 지키며 집안일을 맡도록 역할이 구분되고, 가부장제를 질서의 기준으로 삼던 시대는 오래 전에 무너졌다. 그런데도 사고방식은 옛날 그대로 남아 여성 혼자서 가정을 지키느라 전전긍긍하는 일들이 있다. 배우자중 한사람이 지키지 않는 가정을 다른 한사람이 일방적으로 지키기를 기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리한 생각이다.
“그냥 살기도 억울하고 그만 살기도 억울하다”는 여성들을 주위에서 본다. 남편이 변해주기를 바라며 참고 참으며 사는 데 도무지 변하지 않을 때 하는 푸념이다. 아내들의 참을성에 한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들은 알았으면 한다. 이인승 자전거에서 한사람이 도무지 페달을 밟지 않으면 혼자 힘으로 버티던 다른 한사람은 결국 지치고 자전거는 쓰러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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