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꼭 10년 전 5월 어느 날 이른 아침 아홉번째 눈 수술을 마쳤다. 그날 이후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 무엇도 전혀 볼 수 없는 맹인이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물리적으로 현실과 완전히 격리되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래 봐도 나는 거칠 것 없이 야생마처럼 세상을 누려오지 않았던가. 늙어가는 나이에 시력의 완전 상실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잔혹한 형벌이었고 절망이었다.
빛이 없는 암흑상황에 굴러떨어져 빈사 상태에서 생리적 이상 징후도 나타났다. 음식물을 취할 수 없었고 소변 대변 기능이 며칠씩 멈춰 버렸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이 내린 형벌로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끊임없이 산꼭대기로 굴려 올려야 했던 ‘시지프의 시련'이 오버랩핑 되면서 더더욱 절망에 빠져들었다.
시력 잃은 존재로 살아남느냐 아니면 더 이상의 삶을 포기할 것이냐 갈림길에서 방황하였다. 아내(이문자)는 쉴 새 없이 울먹이는 눈치였다.
아들(호종, Justin)이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Talking Watch)’를 구해와 위로했다. 동포 이웃들, 서울에 있는 동지들, 가족들의 격려와 응원이 쇄도했다. 진정성 어린 염려, 성원 덕택이었나 온 몸에 피가 돌고 삶에 대한 의욕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모든 인류가 세상에 태어난 이상 ‘시지프의 시련’을 경험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 누구나 형태는 다르지만 시련과 갈등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성인들도 일체무(一切無)를 내세우고 겸손, 평화, 용서를 가르쳐 온 것이 아닌가. 오래 살아보면 누구나 육체에 고장이 오고 청력 장애, 뇌 기능 파괴, 오장육부 질환 등으로 고통을 받거나 또는 물질, 명예, 인간관계 등 하찮은 것들로 갈등 시련을 겪고 있지 않는가.
결국 나는 실명이라는 어려움이 나에게만 찾아온 시련이 아니고 누구나 안고 있는 일상이라는 결론을 찾아냈다. 마치 실명이라는 시험대에 나 혼자만 놓이게 된 것처럼 생을 마감하려는 것은 생명을 주신 신에 대한 배신이요, 비굴한 패배주의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으로 가는 것은 내 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에 지는 것이다.
의사가 처방해 준 Nostalgia(향수병) 치료 항우울제(Anti Depressant) 봉지를 휴지통에 쑤셔넣고 일어섰다. 지금이 내가 거듭 태어나는 시간이로구나….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인생을 새로 다듬고 학습해 오고 있다.
먼저 신께 감사드린다. 눈이 망가지지 않고 정상적으로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어떤 끔찍한 비극이라도 겪었을지도 모를 텐데 갑작스런 실명으로 행동을 좌절시킨 것을 다행으로 받아들인다. 오랜 시간 무탈하게 살아왔으니 확률적으로 한 번쯤은 무슨 변고가 일어났을 수도 있는 것을 실명으로 좌정하여 예방해 준 것이 아닌가. 내게 있어서 실명은 형벌이 아니고 축복이라고 안도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세상은 차원 다른 꿈과 포부를 잉태한다. 의미 있는 회오와 기도도 동반한다. 화해와 용서가 폭넓게 그려진다. 사랑 넘치는 이상향이 펼쳐지기도 한다. 속세를 넘어 거기엔 또 하나의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광명이 있다.
시각 장애인, 안드레아 보첼리는 세계적인 맹인 성악가다. 불후의 대작 ‘실낙원'(Paradise lost)와 ‘복낙원(Paradise Regained)을 쓴 작가도 맹인 존 밀튼이다. 그의 딸이 받아쓰기(dietation)를 도왔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은 완전 청각 장애인이 되면서도 심포니 제6번 ‘전원'(Pastorale)부터 제9번 ‘합창’(Choral)을 완성하여 음악계 성인(악성)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가 실명을 하느님께서 내리신 축복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단순한 자위가 아니다. 이웃들, 가족들의 격려와 성원이 물론 큰 힘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 나의 영혼에 용기를 불어넣고 분발에 동기를 부여해 준 것은 아내(이문자)의 사랑이 원천이었음을 고백한다.
전혀 보이지 않는 한 인간을 보필한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애로, 고충이 따르겠는가. 아내는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투정, 불평 없이 도와주고 있다.
실명인 나에게 이토록 성실한 반려자를 점지해 주신 것은 하느님의 나에 대한 배려로 지극한 감사와 감동을 멈출 길이 없을 정도다. 진한 꽃향기가 은은하게 멀리 소리 없이 번지듯 아내의 나에 대한 진한 사랑이 은근하게 이웃들의 심금을 울려 나에게 사랑으로 전달되어 오는 것 같다. 나의 실명 10년, 앞으로도 이어갈 일화,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다.
(571)326-6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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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두루미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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