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칼럼) 세상사는 이야기
▶ 고경호 (화가)
며칠 전에도 나는 내 일이 그림 그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어떤 이로부터 "참 좋은, 여성스러운 일을 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참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여성스럽다"는 표현은 사실 나를 당황케 한다. 물론 애매하나마 그 말이 내포한 예민함이나 섬세함, 또 작가들이 작품을 낳기 위하여 겪는 진통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말에서는 한국 방송계의 PD들이 만들어준 ‘비 오는 날의 수채화’ 풍의 장식적인, 다소곳한 여성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는 탓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사람들의 선입관과 여류 화가들의 삶의 현실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내가 아는 한 그림이나 아니면 그 어떤 창작작업이라도 그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주변의 모든 방해공작(?)과 싸우며 치러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전쟁이다. 즐거운 다른 일을 접고 작업에 집중하는 일, 또 작업이 한계에 부딪힐 때 포기를 거부하는 일, 그러다가 작업이 끝나면 전시를 찾아 그림을 걸기까지의 수많은 순간들을 작가는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감정 소모를 견디며 버티어야 한다.
작업환경의 경우도 작업이 한창 진행중인 스튜디오는 그야말로 야단법석이다. 벽과 바닥에 널린 종이와 캔버스 사이를 오가며 붓과 물감, 또 다른 재료들을 양손에 들고는 우유상자 위에는 예사로 올라서고 여차하면 사다리까지 동원이 된다. 어떨 때는 남자들도 들기 힘들어하는 그림을 번쩍번쩍 옮겨다녀야 하니 사실 보통의 에너지나 체력으로는 감당하기도 힘든 꽤나 남성 성향이 강한 직업인 셈이다.
거기다가 자꾸 그리다보면 집이고 스튜디오고 그림이 쌓여서, 살려고 그리는 건지 그림에 깔리려고 그리는 건지 헷갈리게 되니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집을 ‘꾸미는’ 일과도 거리가 있는 셈이다.
별로 우아하지도 않은 현실 속에서 아직도 많은 여류 화가들이 포기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그럼 무엇일까? 대학 때 사회학 시간에서는 ‘물질적 대가’와 상관없는 노동은 (봉사활동을 빼고는) 공부와 순수예술 창작뿐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동료중 한 사람인 매스터 프린터 토비는 예술은 깊은 병이라고 정의했다. 팝 아트의 거장 짐 다인의 ‘하트 시리즈’를 찍었던 유능한 판화 공방의 주인인 그는 자신은 재능이 없어서 화가의 꿈을 접고 그 대신 화가를 돕는 기술직인 공방 쪽을 택하게 되었다고 했다. 물질의 대가가 없어도 자주 빠져드는 작가들이나 아니면 재능이 없으면서도 그 근처에라도 머물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주변에 머무르는 자기 같은 후원자들이나 소장가들이나 모두가 다 예술이라는 병이 깊다며 웃는 것이었다. 가끔 그 말이 생각나는 것은 나 또한 예술은 짝사랑일지언정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랑의 병이라는 생각이 드는 때문이다.
예전에는, 흔히 듣게 되던 ‘중견화가’라는 지칭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순수를 앞세운 열정으로 꽉 차있던 시절에 듣던 그 낱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느슨한 현실에 타협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그 말을 들으며 다른 선배작가들을 뵈오면 따뜻한 감동이 마음에 서서히 차는 것을 느낀다. 과연 저분은 어떤 수많은 ‘잠 못 이루는 밤’의 자괴감의 고통을 이기고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 머무르고 계실까 싶어서이다. 창작이란 재능(능력)이나 마음(적성) 만으로는 안 되는 지속적인 헌신과 절제가 필요한 일상임을 갈수록 깊이 느끼게 되는 때문이다.
본격적인 창작에 들어가기 전 보통의 작가들은 에너지를 모으는 집중된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는 멍~하니 노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괴팍하게도 보이며 건망증이 심해진 것도 같아 보인다. 이럴 때 혼자 칩거하며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걱정이 없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주변의 식구나 지인들은 범국민 창작후원회(?)의 마음으로 작가에게 잠시 시간을 주는 아량을 베풀면 어떨까 싶다. 속에 고인 샘물을 다 퍼내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정상인’의 모습으로 돌아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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