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회사 최고 경영자들은 본래 천주교 사제만큼이나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단체나 제도도 그렇지만 사람도 한번 신용을 잃은 뒤에는 명예회복이 쉽지 않다. 처신이 어렵고 단체를 이끌기 쉽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요즘 지독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다. 미국의 일부 저질 문화가 세계 지성들로부터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미국의 정치 철학과 막강한 군사력이 세계인의 질시와 반미감정의 근원이 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미국의 경제력에 프라이드를 느꼈고, 세계 굴지의 미국 회사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무엇보다 신뢰했었다.
미국에서 꽃 피운 자본주의의 정수를 전 세계 기업인들이 와서 배우고 본 받아야 마땅하다고 자부해 온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닌 듯 싶었다. 미국의 자본주의를 만개시킨 CEO들은 만인의 부러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며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지위와 대우를 당연하게 받았다. 이들에겐 할리웃 톱스타 이상의‘셀레브리티 스테이터스(명사 자격)’가 주어졌다.
만사를 돈으로 따지고 돈으로 재는 미국사회가 CEO들에게 주저 없이 억대(원화가 아니고 달라 단위) 연봉을 지불하고 그것도 모자라 억대 보너스도 감사히 바친다. 그들의 손이 닿으면 모두 금으로 바뀌고 그들이 실없이 뱉는 말 한 마디도 경영의 금과옥조로 둔갑했다. 말단 종업원들의 급여는 10센트를 올려주는 것도 아까워하면서 CEO들의 봉급은 기본 단위가 예외 없이 밀리언 수준으로 책정된다. 그들은 당연히 사회의 제왕들처럼 행세했고 원하는 것마다 몽땅 이루는 듯 싶었다.
엔론 사건이 터지고 월드컴, 타이코 등 대회사들이 회계장부 조작을 자행한 사실이 속속 터지자 맨 먼저 놀랜 사람들은 일반 서민이었다. 예전부터 익히 짐작하고 있었던 사건들의 실체가 들어 난 것이라면 하등 놀랄 뉴스가 아니었겠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라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뉴스가 터지자 실망과 함께 반신반의했던 서민들은 심한 통증과 함께 극도의 배신감에 빠졌으며 지금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있다. 회계부정 사실이 본격적으로 스캔들화 하기 시작한 금년도 2/4분기와 7월 중 다우존스지수는 16%, 나스닥은 28%나 각각 폭락한 사실만 보더라도 투자가들의 분노와 주식시장의 실망을 짐작할 수 있다. 한때 막강했던 엔론과 월드컴의 주가는 폭락정도가 아니라 휴지 종이 화하고 말았다.
70억달러 장부조작이 들통난 전화회사 월드컴의 부정행위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경제 부정행위로 기록될 것이며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파산이 될 것이다. 최근 터진 일련의 회계부정 사건은 닷컴과 통신 산업의 몰락과 때를 같이해 미국경제의 추악상을 벗겨 놓았을 뿐 아니라 2001년도 불황에서 겨우 벗어나기 시작하는 미국경제에 찬물을 끼얹음으로서 세계경제의 앞날까
지도 어둡게 하고 있다.
경기회복의 초기 단계에서 기업수익이 개선될 기미를 보이는 회사도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누가 거짓말을 하며, 누가 바른 수치를 내놓는 것인지 확신이 안 서는 판국이다.‘믿을 놈 없다’는 불신풍조가 소비자와 투자가들 심리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9·11 테러사건으로 크게 위축된 미국인들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정까지 불안해짐에 따라 경기회복이 지연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부당국은 각종 해결방안과 차후 예방책을 내놓고 있으나 서민들이 대기업과 경제전반에 대한 신뢰를 되찾게 되기까지는 장기간이 필요하게될 전망이다.
미국인들의 불안감은 미국경제가 1970년대의 맥빠진 경제상태나 1990년대의 일본경제 위기를 재현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경제성장이 멈추고 구직난에 실업율 증가, 그리고 주식시장 침체 가능성까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악순환이 반복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 없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은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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