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붉게 물드는 단풍과 떨어지는 낙엽이 없는 북가주의 가을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을지는 몰라도 가을은 가을이다. 하늘이 깊어지고 사색이 깊어지고 인생이 깊어지는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했으니 이 가을에 읽을만한 책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성경의 시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아직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시편은 좋은 읽을 거리이다. 성경이라고 하면 미리 짐작으로 딱딱하고 교리적인 책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시편은 그렇지 않다. 시편은 말 그대로 시다.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고 이해하지 못할 교리를 나열해 놓지도 않는다. 그래서 성경을 처음 대하는 사람이나 혹은 성경이 지겹고 딱딱한 책이라는 선입관을 가진 사람들은 이 가을에 시편을 한번 펼쳐보기를 권한다.
총 150편에 달하는 시편은 그 하나 하나가 완성된 한 편의 시들이다. 시의 기능은 사실의 증명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설명이 아니라 느낌이요, 이미지요, 이야기다.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다양한 시편들은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각각의 시편들이 전혀 다른 주제를 전혀 다른 톤으로 노래한다. 심지어 같은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시편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당시 형편에 따라서 매우 다른 음조의 노래로 들려질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과연 어느 것이 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가식 없는 진실인가에 대해 의심이 생길 수도 있다. 어떨 때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다가도 또 다른 때는 전혀 다른 음조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투로 말하던가 혹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버리고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한탄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그래서 교리적인 해석의 틀을 들이대고 시편
을 해석하려고 한다든지 신학적으로 시편을 이해하려고 하면 당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런 혼란과 변화 무상함이야말로 진실이며 또한 훨씬 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시편은 그냥 시로 읽자고 권하고 싶다.
시편을 읽을 때 그 다음으로 이해해야 할 사실은 시편의 수신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나머지 책들은 전부 대상을 사람으로 한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직접적인 수신자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씀들을 영감으로 주신 것이다. 반면에 시편은 농부나 왕이나 음악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그들의 다양한 삶의 정황에서 그들이 대면하는 문제들 속으로 하나님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그들의 사랑과 신뢰와 존경을 찬양으로 노래하는가 하면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불평과 실망감과 회의를 그대로 쏘아 보낸다. 어쩌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까지 당돌하고 무례할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할 정도로 직선적이다. 악인들에 대한 저주와 심판을 촉구하며 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조금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모든 솔직함들 가운데는 인생의 모든 정황들 속으로 하나님을 끌
어들이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형편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을 풀어나가고자 하는 믿음이 엿보인다.
이렇게 시편을 하나님을 향해 토로하는 인간의 호소와 고백으로 이해한다면 시편은 접근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또한 우리 안에 뱀처럼 똬리를 튼 스트레스들을 호쾌하게 날려보낼 수 있는 정서적, 영적 분출구를 제공해 준다. 나 자신을 살펴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을 확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우울하고 실망하고 머뭇거리고 모호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시편을 읽으면 나뿐만 아니라 영적인 거인들도 때로는 그렇게 느낄 때가 있었다는 것이 엄청난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시편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나 자신이 훨씬 더 솔직해 지도록 도와준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사는 것을 나는 매우 만족하지만 두 가지 아쉬움을 들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없다는 것과 가을에 붉게 물드는 단풍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비록 단풍은 없지만 어느덧 가을은 우리 곁에 와 있다. 이 가을엔 시편을 산책하자. 시편 속의 하나님과 더불어 가을을 산책해보자. 시편이 이 가을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며 시편 속의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사족으로 덧붙이는 말.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단풍을 보고 싶은 분은 밀브레(Mill brae)에 있는 테일러(Taylor) 블러버드를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유독 그 부근은 단풍나무들이 모여 있어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혹시 그 외에도 이 지역에서 단풍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rolcf@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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