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사회가 큰손님을 맞는다. 오는 28일 김대중 대통령이 멕시코에서 열리는 아·태 경제협의회(APEC) 정상회담 참석 후 귀국 길에 시애틀에 들러 하룻밤을 묵으며 서북미 지역 동포들을 만난다. 원래 김 대통령은 작년 가을 시애틀을 방문하려다가 9·11 사태가 터져 취소했는데 용케도 임기가 끝나기 전에 시애틀을 방문할 수 있게 됐다.
시애틀은 전두환·노태우·김영삼 등 전 대통령들이 꼬박꼬박 찾아줬고 이번에 김대중 대통령도 임기 마지막 해외 여행지로 선택할 만큼 역대 한국 대통령들과 인연이 깊다. 그런 의미에서 시애틀 지역 한인사회는 행운이며 자부심을 가질만하다고 본다.
우리는 조국을 사랑한다. 그래서 삼성 컴퓨터와 현대 자동차가 미국에서 잘 팔린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월드컵 경기서 한국이 4강에 진출했을 때 동포들은 새벽잠을 설치고 중계방송을 시청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애국심의 자연스런 발로이다. 동포들의 가슴에는 몸 속에 흐르는 피처럼 숙명적으로 조국을 향한 애국정신이 흐른다. 잔뼈가 굵은 모국, 부모님의 나라에 대한 동경과 애착은 감상적이기에 앞서 본능적이다.
바로 그 조국을 상징하는 대통령이 방문하는 데 환영하지 않을 동포가 있을까? 비록 비공식 방문이고 소위‘레임 덕’시기의 방문이긴 하지만 조국의 현직 대통령이 찾아온다는 것은 지역 한인사회에 엄청난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모르긴 해도 언론이 선정하는 2002년 서북미 한인 커뮤니티의 10대 뉴스에서도‘DJ 방문’이 톱을 장식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 대통령은 시애틀을 방문한 선임 대통령들과 달리 국제적인, 또는 한미간의 공식행사와 무관하게 이 곳을 찾는다는데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올드타이머들은 김 대통령이 힘들고 외로웠던 재야시절부터 이곳 한인 인사들과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어왔다는 점을 잘 안다. 이번 그의 방문 목적 가운데는 이들 옛 동지와의 해후도 포함됐을 것으로 보인다.
DJ를 맞아 우리 한인사회는 조국 행정부의 수반에게 직접 물어볼 것도, 건의할 것도 많을 것이다. 말만 무성했던 교민청 설립문제, 이중국적 인정문제, 동포자본 유입문제 등 해묵은 궁금증에서부터 요즘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북한의 핵 보유설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특히 ‘햇볕정책’의 진로 등 밤을 새워 얘기해도 남을 만큼 화제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신선미도 없고 시애틀 한인사회와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원론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모처럼 대통령을 대한 자리에서는 우리만의 문제를 진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워싱턴대학(UW)의 한국학 존속을 위한 한국정부의 지원을 건의할 수도 있다. UW은 미 전국에서 알아주는 한국학의 명문이다. 수천명의 한인 자녀들과 한국 유학생들이 재학하는 UW에 한국학이 폐지된다면 이 지역 한인사회의 위상이 추락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최악의 경기침체로 인해 취업난을 겪고 있는 서북미 지역 한인 1.5~2세들의 본국 취업 또는 활용 방안을 강구해주도록 건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랜 군사독재의 악몽 때문인지 한국의 국가 원수가 방문한다면 으레 항의 데모대가 연상된다. 노태우, 전두환 등 권위주의 대통령이 왔을 때는 총영사관 앞길에서 징과 꽹과리를 울리는 등 데모가 참으로 요란떨떨했지만 나름대로 명분이 뚜렷했다. DJ도 시위대를 만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미국에선 시위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DJ는 다른 대통령과는 좀 다른 점이 있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퇴임을 앞두고 서북미 한인들을 만나기 위해서 이곳에 온다. 온갖 풍상을 겪은 후 대통령이 되고 한국인으로는 첫 노벨상 수상자가 된 큰 꿈을 이뤘지만 세 아들과 측근의 비리 때문에 빛이 발한, 어떤 면에서는 비운의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단 하루를 머무는 그가‘시애틀에서 잠 못 이루는 밤’을 경험한다면 너무나 안쓰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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