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친부모도 모시기 귀찮아하는 세태에서 ‘생판 남인’ 이웃 할머니를 17년간 모셔 온 부부가 있어 각박한 세상에 훈훈한 정을 전해주고 있다.
지난 26일 저녁 칼리지 파크 소재 한식당 ‘이조’에서는 구순(九旬)을 맞은 이복순 할머니의 건강과 백수(白壽)를 기원하는 조촐하지만 화기애애한 잔치가 벌어져 사람들의 가슴에 따뜻함을 전달해 주고 있었다.
이날 잔치는 메릴랜드 그린벨트에 거주하며 지난 85년부터 이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 온 윤창길(56, 유니 오토바디 대표), 윤일순(54) 부부가 마련한 것.
윤씨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한데 오히려 쑥스럽다’며 손사래를 치다 투박한 경상도 억양이 섞인 목소리로 한 만디 했다.
"큰 자랑거리도 아닌데…, 제가 베푼 것은 없어요. 오히려 제가 할머니와 아이들로부터 ‘귀한 사랑의 마음’을 훨씬 더 많이 받았어요."
이날 잔치에는 이 할머니의 외손주인 차종석(38), 혜숙(29)씨 남매를 비롯 이 지역에 거주하는 윤씨부부의 동생 가족, 친지들이 모여 윤씨 부부의 노고를 격려했다.
윤씨 부부가 이복순 할머니와 그의 손자인 종석, 혜숙 남매와 같이 한 집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85년부터.
할머니는 스물 네 살의 젊은 나이에 6.25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유복자인 딸 하나를 두고 청상과부로 평생을 살아왔다. 가난한 피죽도 먹기 힘든 시절 온갖 궂은 일을 다 겪으면서도 오직 딸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 온 할머니에게 딸 은 할머니의 인생이었고 전부였다.
결혼한 딸과 사위가 미국으로 이민가기로 결정했을 때도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피붙이인 딸의 곁에 있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했다.
딸 영자씨가 미국에 이민와서 처음 정착한 곳이 메릴랜드 하이얏츠빌 헤밀턴 아파트 단지.
할머니와 경남 창원 출신인윤씨 부부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77년 취업이민으로 미국에 와서 정착한 윤씨 부부의 세 자녀를 이복순 할머니가 베이비시터로 봐 주면서부터. D.C 흑인촌에서 하루 12시간-15시간씩 일하는 딸을 돕기 위해 할머니는 외손주와 윤씨 부부의 아이들을 돌봐준 것.
그러나 행복도 잠깐, 지난 85년 그로서리를 운영하며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고 착하기만 했던’ 딸의 가게에 총을 든 무장강도가 침입, 딸은(당시 42세)현장에서 절명하고 사위는 부상당하는 ‘청천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은 사고가 났다.
갑자기 엄마와 딸을 잃은 두 아이들과 이복순 할머니의 슬픔과 절망은 말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과 불면에 시달리면서 말을 잃기도 했다. 이 와중에 사위는 할머니와 두 아이를 남겨둔 채 1년도 안돼 재혼, 타주로 떠나가버렸다. 이때 대학을 다니던 손자 종석씨는 학교를 중단하고 방황했으며 중학생이던 손녀 혜숙씨는 할머니를 붙들고 울기만 했다. 이들의 딱한 모습을 보다 못한 윤씨가 할머니와 아이들을 거두기로 결심하자 부인 역시 기꺼이 승낙했다.
이렇게 산 세월이 올해로 17년째.
윤씨는 "깊은 방황을 거듭하던 종석이가 마음을 잡고 건실한 청년으로 거듭난 것과 혜숙이 역시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줘 너무 감사하다"면서 "할머니 역시 건강하셔서 감사한 마음 뿐"이라고 말했다.
이들 남내는 윤씨 부부를 ‘큰아버지, 큰 엄마’로 부르고 윤씨 부부의 2남1녀와는 친동기간 이상으로 지낸다.
이제 종석씨는 결혼해서 초등학생 아들 하나를 둔 가장으로 세라믹 타일 관련 사업가가 됐고 혜숙씨는 펜실베니아 주립대를 졸업한 후 마켓팅 비즈니스에 종사하고 있다. 윤씨부부 집에서 가까운 실버스프링에 거주하는 이들 남매는 "맨처음 아저씨라 부르다 자연히 큰아버지로 호칭이 바뀌었다"면서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송두리째 흔들리던 우리 가정을 사랑으로 붙들어 주신 고마우신 큰 엄마, 큰 아버지께 감사드린다"고 잔치 자리에서 말했다.
현재 할머니는 혈압약 복용과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곤 매우 건강하다.
부인 윤일순씨는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어려운 것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자기 부모 모시고 사는 데 힘들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까?"라고 반문, 이들 부부의 ‘이웃사랑’의 깊이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즐거운 잔치상이 마련된 이날, 한국에 계시던 윤씨의 친어머니(79세)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들 부부는 서둘러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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