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학자 칼럼]
▶ 정호웅(문학평론가, 홍익대 교수)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과 함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자주적인 통일 민족국가 수립·토지개혁·친일잔재 청산 등의 깃발이 내걸리고 한국 사회는 대변화의 물결에 휩쓸렸다. 사회 전 영역에 걸쳐 파괴와 복구 또는 창조의 힘찬 맥동이 고동치며 한국 사회를 혼란스럽지만 충만한 가능성의 미래를 향해 밝게 열었다.
이 같은 현실은 소설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소설 대부분의 한복판에는 저마다의 지향을 담아 싣고 흐르는 ‘길’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 길들은 작가의 이념적 입장을 좇아 미국류의 자본주의 체제 건설을 향하기도 했고, 또 많은 경우 소련식 또는 중국식의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도모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우스꽝스럽기조차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는, 봉건적 왕조 시대로의 복귀를 꿈꾸는 시대착오적 몽상에 이끌리는 길도 있었다. 살길을 찾아 만주 벌판과 한국 땅을 헤매 다니는 일본인들의 비참까지 껴안아야 할 것을 주장하는 무한포용의 자비심을 따라 흐르는 사해동포주의의 넉넉하고 따뜻한 길도 있었다.
그 많은 길 가운데, 캄캄 어둠 속에 묻혀 거의 잊혀진, 해방 이전 친일의 과오를 깊이 앓으며 고뇌하는 자기비판의 준엄한 정신이 이끄는 길도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자신의 문학을 열어나간 작가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채만식(1902-1950)이다.
채만식은 그의 작품들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국정)와 문학 교과서(검인정)의 곳곳에 실려 있어 이광수, 염상섭, 김동인, 현진건 등과 함께 널리 알려진 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의 친일 이력을 파고든 해방 후의 자기비판소설들은 대학의 연구실 밖 일반인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채만식은 일제 말기 [여인전기], [홍대하옵신 성은] 등의 친일적 작품 몇 편을 발표하고 몇 번 시국강연회에 나가 강연함으로써 친일의 욕된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해방이 되자마자 친일잔재 청산이 민족적 과제의 하나로 제기되고 일제하 친일행위자의 법적 처벌 문제가 중요한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이를 따라 문학계에서는 자기비판이 중점적으로 거론되었는데 대부분 문인들은 혼란스러운 혁명적 상황에 휩쓸려 또는 이에 편승하여, 자기비판의 과제를 회피하거나 아예 없었던 것인 양 지나치고자 하였다. 채만식만이 거의 유일하게 자기비판에 충실하고자 했던 문인이라 할 수 있는데 [역로], [민족의 죄인] 등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이들 작품에서 채만식은 친일의 죄의식에 짓눌려 고뇌하는 자신의 내면을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고 성실하게 파헤쳤다.
자신의 친일 행위를 깊이 파헤친 채만식의 윤리적 성실성은 친일 문제뿐만 아니라, 변절과 배반의 기록들로 가득 차 있는 한국의 근현대사 100년에 어떤 자세로 접근해야 하는가를 일깨우는 의미 있는 거점의 하나이다. 변절과 배반의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고 했거니와, 해방 이전에 활동한 문인들 가운데 ‘황도사상’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아 식민 지배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나아갔던 일본의 침략주의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그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어디 문인들뿐이겠는가. 이 시기의 한국 지식인 가운데 그 같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 복무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찾기 어렵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지조와 자기희생의 길을 걸었던 분들의 숭고한 삶들을 엮어 놓은 역사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지만, 이 변절과 배반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역사란 진선미의 가치를 높은 수준에서 실현한 것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는 식의 한쪽으로 치우친 역사의식이 제도교육을 지배해왔고, 한국 사회를 이끄는 문화의식의 핵심에 자리잡아 작동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부정적인 역사 사실을 은폐하고 긍정적인 것만은 내세우는 것은 역사의 왜곡이니 진실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다. 그 같은 역사 왜곡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차단함으로써 변절과 배반의 역사가 거듭 반복되는 불행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런 현실을 살고 있다. 치욕의 역사이니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고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헐어버리는 식의 단순 사고로는 저 변절과 배반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 과장된 분노 속에는 어쩌면 자신의 내부에 깃들인 변절과 배반의 기억과 가능성을 은폐하려는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 변절과 배반의 역사는 바로 앞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역사로서, 지금의 우리와 한국 사회를 배태하고 키워낸 모태이다. 우리는 그 변절과 배반의 역사라는 자궁 속에서 태어난 어둠의 자식들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직시하는 데서 저 변절과 배반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직시는 한국의 지난 역사와 현재를, 그 속에서 나서 자라 그 한 부분으로 살고 있는 한국인 저마다의 존재를 안팎으로 총체적으로 반성하도록 이끌 것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채만식의 삶과 문학을, 그가 싫어했던 강대국 미국 땅에서 되돌아보며 해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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