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요동치던 대선 정국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그리고 국민들은 선택했다. 백범 김구와 링컨을 좋아한다는 노무현 후보가 21세기 첫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가 왜 링컨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직접 듣거나 읽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10여차례나 각종 선거에서 떨어졌던 링컨의 이력이 ‘정치적 고향’ 부산에서만 3번이나 고배를 마셨던 자신의 정치역정과 비슷한 데서 온 동병상련의 정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가 나중에 어떤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지는 두고 봐야겠으나 노무현도 일단 링컨처럼 대통령 당선에는 성공했다.
노무현의 당선은 몇 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들은 다음 대통령을 뽑았지만 그것은 ‘인물 선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문화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의 성공은 지금까지의 정치문화 속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막강한 자기 조직과 지역 기반, 그리고 많은 경우 그러했듯이 군의 총칼을 등에 업지 않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혹시 이번 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조심스레 내비칠라치면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핀잔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러나 돈도 조직도 없이 단기필마로 대선 경쟁에 뛰어든 노무현이 결국 최종 승자가 됐다.
국민경선 출발선에 섰을 당시 노 후보는 달랑 단돈 몇백달러 쥐고 혈혈단신으로 일가친척 하나 없는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와 같은 처지였다. 반면 거대 야당의 총재로서 막강한 조직과 자금력을 쥐고 있던 상대후보는 수십만달러 투자이민자처럼 여유로운 입장이었다. 승부는 뻔한 듯 보였지만 국민들은 허를 찌르는 선택을 했다.
노무현은 평소 “바른 길로 가는 정치인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다”는 말을 자주해 왔다. 그는 당선이 보장된 서울을 버리고 지역구도를 깨뜨리겠다며 고집스레 부산에서 출마했고 번번이 낙선의 고배를 맛봐야 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보 노무현’이다. ‘바보 노무현’은 자신의 바람대로, 정치인이 줄서기를 하지 않아도 능력과 올바른 신념만 있으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음을 극적으로 증명해 줬다. 그는 이번 승리로 비단 정치권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새로운 가치의 씨앗을 뿌렸다.
한국민들의 의식은 크게 달라져 있고 노무현의 등장은 이런 변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노무현은 그의 털털한 외모만큼이나 서민적인 면모로 국민들에게 많은 재미와 감동을 줄 것으로 기대가 된다. 그러나 그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역사의 교훈과 초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철학자 헤겔은 “경험과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국민과 정부는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고 또한 역사로부터 얻은 원칙에 따라 행동한 적도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설로 치부할지 모르겠으나 지난 정권들이 바로 앞 정권의 실수를 되풀이해 온 것을 돌아볼 때 뼈 속 깊이 새겨들어야 할 지적이라 생각한다. 아무쪼록 과거와 역사가 던져주는 교훈을 잊어버리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물고기의 기억력을 지난 정권이 돼서는 안된다.
8개월에 걸친 대선 장정은 또 하나의 부산물을 안겨줬다. 이해관계에 따라 당과 말을 바꾸고 신의를 헌신 내팽개치듯 하는 쭉정이 정치인들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가려내게 된 것이 그것이다. 다음 총선에서 이들을 제대로 심판한다면 이번 대선으로 시작된 조용한 국민혁명의 1단계를 마무리하는 화룡점정의 작업이 될 것이다. 잘 사는 나라도 좋지만 그보다는 바로 서 있는 나라가 해외에 사는 우리들이 진짜 보고 싶은 조국의 모습이다.
조윤성<부국장겸 특집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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