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금요일은 밸런타인스 데이였다.
여자의 마음이란 참 이상도 하지. 이런 날이 되면 남편외에 꽃을 보내줄 사람이 분명히 없는데도, 혹시나 누구에게선가 근사한 장미꽃이 배달되어 오지나 않을까 하여 막연히 기다리는 마음이 되니 말이다.
이런 여자의 심리를 잘 아는 것이 여자들. 지금으로부터 14년전 이런 일을 당했다.
결혼후 처음 맞는 밸런타인스 데이였다. 남편이 꽃다발을 보내왔다. 당연히 의기양양 자랑스럽게 책상머리에 놓아두었다. 그런데 오후쯤 되어 꽃이 또 하나 배달되어 왔다. 몇 송이 안되었지만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리본도 묶고 예쁜 병에 꽂은 장미꽃이었다.
누가 보냈는지 의아하여 쪽지를 보니 이름이 없었다. 대신 거의 사랑의 시에 해당되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대 떠나갔음에도 나의 가슴에는 그대가 살아있고, 그리움을 간직한 채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는 등의 구절이었던 것 같다.
얼마나 흥분되고 궁금하였는지... 나는 속으로 영화도 찍고 소설도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를 짝사랑했는데 내가 결혼한 후 상심했나보다, 편집국의 아무개 총각기자는 아닐까? 취재할 때마다 은근히 추파를 보내던 그 사람은? 아니면 한국에 나갔을 때 선을 보았던 사람이 친구를 시켜 꽃을 보냈을지도 몰라... 상상의 나래는 끝이 없었고 내 주위의 온갖 남자들이 후보선상에 올라 한사람씩 검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 꽃은 장난이었다.
지금은 신문사를 그만 둔 선배 여기자와 후배 여기자 두사람이 공모하여 나를 놀리기 위해 보낸 것이었다. 한창 신혼인 내가 의문의 남성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구경이나 하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단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착잡해져가는 나의 표정을 관찰하고 지켜보며 배꼽을 잡았다는거 아닌가.
이런 여자의 심리를 남자들이 잘만 이용하면 평소 안 넘어가던 여성도 꼬셔볼 수 있을텐데, 여자가 거부한다고 너무 쉽게 낙담하는 남자들이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처녀때 구애하는 남자도 적지 않았건만 하도 깍쟁이 같은 얼굴을 하고 매몰차게 딱지를 놓는 바람에 남자들이 화들짝 도망가 연애다운 연애를 거의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나의 속마음은 그런게 아니었단 말이다.
아빠를 닮아 순진하기 짝이 없는 아들이 커서 연애를 시작하면 반드시 가르쳐줄 작정이다. 때론 내가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의 마음에 대하여.
각설하고. 올해 밸런타인스 데이는 이제껏중 가장 참담하게 보냈다.
미리 준비를 잘 한다고, 유러피안 전문 초콜릿을 파는 곳에 가서 거금을 들여 초콜릿을 네 박스나 샀다. 남편과 아들, 아들의 학교 선생들에게 보낼 것이었다. 카드점에서 예쁜 사랑의 카드도 한 박스 샀다.
밸런타인스 전날 밤 야근을 하고 밤 11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보니 예상대로 식탁에는 남편이 사다놓은 장미꽃과 하트 모양 초콜릿 박스가 놓여있었다. 무뚝뚝한 아내와 달리 평소 닭살 돋는 말을 잘 하는 남편이 사랑의 표현을 잔뜩 써놓은 카드와 함께.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들어왔는데도 아들은 소파에 누워있고 남편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저녁에 아들이 농구를 하다가 삐끗해 다리를 몹시 삐었다는 것이다.
얼음찜질을 하고 난리를 치며 겨우 재웠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발목이 퉁퉁 붓고 걷지를 못해 아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선생들에게 줄 초콜릿 박스와 카드들은 가져가지도 못한 채, 낮에는 절뚝거리는 아들과 함께 병원을 찾아다니고, 저녁땐 집에서 김치찌개를 끓여먹은, 가장 비낭만적인 발렌타인스 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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