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학자 칼럼
▶ 정호웅 교수 버클리대 방문학자(홍익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온 세상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눈 닿는 곳 마음 닿는 곳마다 포연 자욱하다. 죽음의 단말마 비명소리, 차마 마음 아파 듣고 있을 수 없는 아기들의 애끓는 울음소리, 쾅쾅쾅 타타타 포탄소리 총소리 하늘과 땅을 가득가득 채우고 있다.
무엇을 위한 적의며 죽임이며 안타까운 희생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찾을 수 없다. 그 총소리 울음소리 앞에서 나는 눈뜨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다.
어디 나만 그렇겠는가. 주변의 친지들 대부분이 앞을 볼 수 없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거친 숨결 부여안고 헐떡거린다. 우리 모두는 캄캄 어둠 속에 들어 길을 잃어버린 시대의 미아들이다.
그뿐이 아니다. 사랑과 우정, 남을 위하는 이타의 마음, 이웃과 사이좋게 어울리는 선린의 정신, 타자의 고유한 개성을 인정하여 침해하지 않는 열린 마음 등 지켜야 하고 더욱 더 아름답게 꽃피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믿어온 것들이 거친 폭력 아래 마구마구 찢기고 무너지는 것을 보는 우리의 마음도 함께 찢기고 무너지고 있다. 우리 모두의 안쪽은 그처럼 찢기고 무너져 온통 피투성이이니 우리는 하나같이 정신의 불구자들이다. 정신의 불구자들이 토해내는 신음소리 가득 찬 봄날은 괴기하다. 새로 싹 돋는 신생의 활기로 약동하는 봄날의 한가운데서 듣는 신음소리는 섬뜩하여 질끈, 어금니를 악물게 한다.
여기 한 편의 연시가 있다. 모두 다섯 행으로 된 소품인데 나는 한국의 연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하고 있다.
지은이는 이용악이라는 시인이다. 한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면 아마도 대부분 알지 못할 낯선 이름인데, 그는 서정주 등과 함께 1930년대 젊은 시단을 대표하는 삼가시인(三家詩人)으로 불렸던 사람이다.
살아 {오랑캐꽃}, {낡은 집}, {이용악시집} 등의 시집을 낸 시인 이용악은 삶의 모태인 고향을 떠나 시베리아, 만주 등지를 떠돌던 일제하 유이민의 비참한 현실을 낮지만 힘찬 남성적 호흡으로 노래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고향인 함경북도로 갔기 때문에 오랫동안 월북시인이란 낙인이 찍힌 채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1988년 공식 해금되어 우리 독자들도 서점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그런 곡절의 시인이다.
역사는 때로 비정하지 않을 때도 있는 듯, 죽은 지 30여 년이 흐른 후 이용악의 문학을 복권시키고 한국문학을 빛낸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이란 자리를 문학사의 한가운데에 마련해주었다.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
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것은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
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놓은 꽃가루 속에
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숨어서 나지막이 부르고 싶은 은근한 그리움의 정적(靜的)인 마음 움직임과, 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내달리는 터질 듯한 환희의 동적(動的)인 마음 속 불길이 합쳐져, 하늘 높이 솟구치고 들판 멀리 퍼져나가 온 천지를 사랑의 아름다움으로 가득가득 채우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병적인 열정이 생겨나는데 이 시는 이와는 전혀 무관하다. 정과 동의 절묘한 조화는 배추꽃밭의 ‘노오란’ 색채의 한바탕 향연과 어울려 그지없이 맑고 환한 세계를 일구었다.
온 세상을 뒤흔드는 포성 속에서, 죽음의 외마디 비명과 슬픈 울음소리의 바다 속에서 이 시를 읽는 일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열고 이 아름다운 작은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데서 이 저주와 죽음의 시대를 살며 상처 입은 만신창이 우리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솟아날지도 모른다. 또 모른다. 이 저주와 죽음의 시대를 넘어서서, 어영차 이 시처럼 아름다운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런 작은 힘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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