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면서 열어본 우편함에 아들의 학교에서 온 메일이 들어있었다. 뭔가 궁금하여 얼른 뜯어보니 지난 학기 성적표다. 수학만 C를 받았고 나머지 모든 과목이 A였다.
나는 아들이 한없이 기특하고 대견하여 엉덩이를 둥둥 치면서 “어이구, 이쁜 내 새끼”하며 뽀뽀를 해주었다. 평소 아들의 학업이나 성적에 관하여 조금 지나치게 관대한 나로서는 거의 올 A에 해당하는(내가 보기엔!) 성적표를 받아온 것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더구나 지난 학기엔 B가 세개나 있었는데, 하나 빼고 모두 A로 진출한 것은 보통일이 아니게 느껴졌던 것이다.
‘수학 못하는건 엄마 닮아 그런거니 할 수 없지 뭐. 수학 좀 못한다고 인간이 할 일을 못하는건 아니잖아?’ 그런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오랜만에 은대구조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은대구조림은 알찌개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나의 베스트 생선요리로서 신선한 대구를 사다가 금방 요리해야 하는 관계로 자주 하지 못하는 회심의 역작이다. 이번에는 전날 장을 봐오고, 배까지 갈아넣은 양념장을 미리 만들어 놓았기에 집에 오자마자 금방 시작할 수 있었다. 곁들여 미역국을 끓이고 콩나물을 막 무치기 시작하는데 남편이 돌아왔다.
“여보! 식탁에 원겸이 성적표 있어요”
랄라룰루 거리며 밥하고 있는 나의 뒤에서, 그러나 전혀 예기치 못했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엉? 수학이 C가 뭐야?”
고성은 이어졌다.
“짜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게임만 하고 테레비만 보더니 이게 뭐얏!”
“너 지난번에 뭐라고 했어? 다음엔 꼭 더 잘하겠다고 아빠랑 약속했잖암마!”
내 가슴이 다 쿵쿵거리게 야단을 치면서 남편은 TV앞에 쌓여있던 게임기들을 일시에 뽑아버리고 계속적으로 일장훈시를 늘어놓았다.
미국식 교육은 매보다 칭찬이라고, 수도 없이 이야기를 듣고 신문에도 맨날 나건만 어떻게 A 맞은 과목들에 대해선 단 한마디의 칭찬도 없이 C 하나 갖고 저렇게 펄펄 뛰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있고, 못하는 아이도 있으며, 그 중간쯤 되는 아이도 있다. 또 영어를 잘하는 아이가 있고 수학을 잘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둘다 잘하거나 둘다 못하는 아이도 있는거 아닌가.
걔가 어디서 나왔나. 돌연변이가 아닌 담에야 남편을 닮았거나 나를 닮았거나, 아니면 둘의 머리를 합쳐서 평균낸 어느 정도로 만들어져 나왔을텐데 무조건 잘하라니 그런 억지가 어딨는가 말이다. 내가 알기로 자기가 학생때 그렇게 공부를 잘 한 것도 아니었으면서...
청소년 자녀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전형적인 한국부모의 모습을 내 집에서 보게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치 않았었다.
순둥이 아들아이는 머리를 툭 떨어뜨린 채 야단을 맞고 있었고 잔소리는 식탁에 앉으면서도 계속됐다. 개도 밥 먹을 땐 안 건드린다는데, 귀한 아들을 밥상머리에서 어떻게나 ‘구박’하는지 나는 드디어 머리 뚜껑이 열리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은대구조림이 이제껏 해본 중에서도 최고의 맛이 나게 요리되었건만 식탁위에 밥과 반찬, 식기들을 거의 던지는 수준으로 늘어놓고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부엌에서 우당탕 쿵쾅거리며 설거지하는 것으로 말없이 나의 분노를 표현했으며 그 사인을 감지한 남편은 그 후부터 자제하는 눈치였다.
나는 조금만 기분이 상한 채 밥을 먹어도 밥알이 곤두서 고생하는 일이 잦은데, 그런 일은 식욕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 살벌한 침묵 가운데서도 두사람은 밥과 모든 반찬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일어선다.
아들아, 수학 좀 못해도 상관없다. 해주는 밥 잘 먹고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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