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 청와대 정책수석의 발언이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정책 브레인이며 분배주의자로 알려진 이 수석은 최근 ‘네덜란드식 노사정 모델’을 한국에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그의 발언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노무현 정부 경제 정책의 속내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수석의 발언이 전해진 후 전경련 등 사용자 단체들은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노동단체들도 더 얻을 것이 있다는 듯 못마땅해하고 있다.
웬만한 전문가들에게도 생경한 네덜란드 모델이란 노동자측이 노동시장 유연성을 받아들이고 임금 인상을 억제하며 사용자측은 반대급부로 고용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노조의 경영참여가 허용되며 정부는 중재자로서 이에 대한 합의가 지속 가능하도록 ‘사회적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노사정 합의체가 없는가. 외환위기를 맞으며 노사정 합의로 임금 인상이 자제되고 노동 유연성을 보장하는 제도가 도입됐다. 한국에 이미 제도화된 내용을 뺀다면 네덜란드 모델은 노조의 경영참여를 허용하고 고용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노무현 정부에 우호적인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은 ‘유럽의 문제아’였던 네덜란드가 새로운 노사정 모델을 도입한 후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2만5,000 달러의 고소득국가로 부상했다며 홍보성 기사를 싣고 있다. 문제는 네덜란드가 새로운 모델을 도입하는 과정과 한국에서 이 모델을 수용할 경우의 과정이 다르다는 점이다.
네덜란드는 사회주의 정치 세력이 강해 노조가 일찍부터 정치운동을 해왔고 80년대에 과격한 노동운동이 나라 경제를 좀먹고 있었다. 1982년 네덜란드인들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조에 대한 복지혜택을 대폭 줄이고 임금 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네덜란드 모델은 근로자에 새로운 기회를 더 준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네덜란드에선 좌파 세력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안이 만들어졌지만 한국에선 이른바 진보세력이 진출하면서 새로운 카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축구에선 네덜란드의 거스 히딩크 감독을 수입해 월드컵 4강의 신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경제에선 한국이 네덜란드로 대변되는 유럽식 모델을 따르다가 아르헨티나와 같은 남미형 국가로 전락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아르헨티나에선 2차 대전 직후 후안 페론이 노동자의 힘을 빌어 정권을 장악하고, 이른바 페론주의라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냈다.
포퓰리즘의 대명사로 꼽히는 페론주의는 그 후 군부 정권 시대에서도 아르헨티나 사회 곳곳에 뿌리 내렸다. 노조는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경제 전반에 고질병이 창궐했다. 페론주의는 근로자들에게 직장을 철밥 그릇처럼 보장해 주었지만 근로자들은 적당히 일해도 봉급을 받으니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 산업은 정부의 보호를 받았고 생산성은 바닥으로 떨어져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전화가 제대로 걸리지 않았고 우편물이 전달되지 않는 게 다반사였다. 정부는 인민들에게 빵을 주기 위해 돈을 무제한 찍어냈고 그 결과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었다.
이정우 수석은 재정경제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기업에 세금을 깎아주는 방안을 추진하자 이를 두 번이나 막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배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기업은 가진 자이고 가진 자에게 혜택을 주는 세금 감면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돈을 많이 벌어야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직원의 봉급 봉투가 두둑해지는 것이다.
유럽식 모델 자체가 노동탄력성을 보장하는 미국식 모델보다 경쟁력이 없다는 것은 90년대에 입증됐다. 독일에선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정치 생명을 걸고 연금제도를 뜯어고치고 있다. 유럽 국가 스스로가 제도적 결함을 인정하고 복지정책을 뜯어고치고 있는 마당에 한국의 최고 정책 입안자가 실패한 외국 이론을 끄집어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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