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리에 사는 한 여중생은 며칠 전 비상용 가방을 하나 준비했다. 그리고 여기에 볼펜, 수첩, 지갑, 손전등, 양말, 작은 수건 등 비상 시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긴 10여 가지의 물건을 챙겨 넣었다. 집이 시미밸리 화재 지역에서 한참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비무환의 자세로 준비를 한 것이다.
라카냐다의 한 주민은 평소 재정관련 문서, 집문서, 여권, 시민권 등 주요 서류를 상자에 넣어두고 있었는데 이번 화재가 수많은 가족의 추억을 한순간에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족의 소중한 장면을 담은 앨범, 비디오 테입 등도 간추렸다. 그리고 자녀에게도 너희들에게 중요한 것들을 미리 챙겨 두라고 일러두었다고 했다.
불길이 1마일 지점까지 다가오고 집 주위가 연기로 자욱했다는 포터랜치의 주민은 혹시 불이 번져와 부득불 남의 집 신세를 지게될 것에 대비해 나이어린 아이들의 도시락 통, 속옷 등은 물론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된 자료를 빼냈다고 했다.
갓 이민 와 사이프러스 지역에 둥지를 튼 주민은 산불과 동떨어진 지역에 살면서도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처분해 나무 많고 전망 좋은 곳에 집을 구입하려 했는데 불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며 화재에 대한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번 산불은 예기치 않은 다른 재앙에 대한 긴장의 고삐도 죄게 했다. 평소 지진에 대비해 구입한 50여달러 상당의 장비를 한번 더 점검하게 하는가 하면, 잠시 느슨하던 마음가짐을 다시금 가다듬게도 했다.
지난 94년 노스리지 지진 때 무척 놀란 한 주민은 유사시에 식솔들이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큼지막한 밴을 사서 식수, 건빵, 내복, 옷 등 기본적인 생필품을 트렁크에 싣고 다녔다. 그리고 물, 식품 등 일부 물건은 몇 개월마다 교체해 주는 정성도 기울였다. 그런데 최근 비상용품을 잠깐 차에서 들어내 집 한 구석에 놓아두었다. 그런 뒤 며칠만에 시미밸리에서 산불과 경미한 지진이 잇달아 발생하자 지진 비상용품을 신속하게 추려 밴 트렁크에 다시 실었다고 했다.
이들 한인은 샌디에고, 시미밸리, 샌버나디노 마운틴 등 화재 현장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 화마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번 산불로 경각심을 갖게 된 것이다. 지진과 산불에의 대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홀연히 사라진 야속한 산불이지만 덤덤한 일상에 ‘찌릿한 자극’을 준 것은 그나마 우리에게 남긴 ‘작은 선물’이 아닐까.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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