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숙자/수필가
해마다 찾아오는 연말이지만 어느 한 해도 흡족하게 보냈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지난 세월 속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계획했던 목표를 위해서 최선을 다 했을까. 근면, 성실했었나 하는 양심적인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고 오랫동안 잊었던 자신과 만남, 내면 깊숙이 자기 성찰을 하게 되는 때가 연말이다. 한 해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회의와 무상이 교차하는 것도 이맘때 일어나는 증후군이다.
우리 동네에는 10월이 되면 연말까지의 남은 날들을 계수하여 전광판에 올려놓는 우체국이 있다. 그 전광판은 숫자를 거꾸로 줄어들게 만들어서 현재가 연말까지 몇 날, 몇 시간, 몇 분, 몇 초가 남아 있음을 알려 준다. 너는 지나간 시간들을 충실하게 보냈느냐? 그렇지 못했다면 나머지 시간이라도 알차게 마무리하거라. 둥그런 벽시계도 초침을 한 발, 한 발 행군하며 무언의 암시를 준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서 있는 자리를 의식하게 하는 현명한 배려이다.
전광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느낌은 대동소이한 것 같다. 무릇 시선을 끄는 것이 있어야 자각함은 아닐 것이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한두 마디씩 이야기한다. 나머지 날들을 긴장하며 살아서 멋지게 올 랭 자인을 부르며 마무리하겠다는 청년의 모습에 패기가 넘친다. 숫자가 줄어들 듯 나이도 줄어들었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말하는 80대 노인의 얼굴이 쓸쓸하다. 시간은 달음질하는데도 급료 날짜는 더디게 오는 것 같다는 우체국 직원의 말에 모두 웃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세월은 흐른다. 짧고 때로는 허망한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행여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이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덧없다는 말이 입에 붙는다. 세속적인 것이 본질적 충족감까지 줄 수 없기에 늘 채워지지 않는 심적 빈 공간을 느낀다. 진실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인간과의 따스한 교감을 나누며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근원적인 허전함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단풍잎으로 곱게 카드를 만들어 보내주는 뉴저지 친구가 있어서 행복하다. 줄 때의 기쁨을 알기에 받을 때의 즐거움이 배가 됨을 안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짬을 내어 거는 전화 한 통이나 해를 넘기기 전에 마음을 담아보내는 카드 한 장이 우리들 마음을 풍성하게 해준다. 삶의 활력을 준다. 상대방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관심을 가지고 깊은 사랑을 전할 때 서로에게 전달되는 행복감은 그 밀도가 다를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며,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보며,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면서 그것을 나눌 때 삶의 여유와 감동이 따를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는 삶의 교훈을 주는 것들이 산재해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기에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 순리를 거슬리지 않고 순응하는 자연에서 얼마나 많은 창조적인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가. 산이, 바다가, 하늘이, 우리를 넓게 품어주지 않는가. 남은 날들이 초조해져서 전광판을 바라보며 앞질러 달아난 시간을 아쉬워 하지말고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심도 있게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맨 처음 누가 일년을 12달로 구분해 놓았을까. 새해가 12달만에 다시 돌아온 다는 것이 그렇게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해에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손 치더라도 곧 새해가 돌아오지 않는가. 새해에는-, 하고 다시 계획하고 희망하고 모든 일을 새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만일 새해가 30달만에 온다든지 40달만에 온다면 우리는 새해 계획이나 포부를, 또 새해맞이를 지금처럼 설레며 감격스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새해에는 주어진 날들을 잘 관리하고 가치 있는 목표를 찾아 마음껏 정진했으면 한다.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면 여유 있고 행복한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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