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롬 서몬드 전 상원의원은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그 사실을 1941년 16세 때부터 알았다. 어머니가 나를 그의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딸과 아버지로 서로를 소개했다. 그 후 일생동안 우리는 따뜻하고 정겨운 관계를 유지했다. 나의 출생 환경이 전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왜 이제까지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서몬드가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그에게나 나에게나 득이 될 것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아버지를 해치고 아버지의 정치 경력을 해칠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숨기라고 내게 부탁한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그 사실을 말하느냐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이것은 전혀 내 의도가 아니었다. 단지 50여년 미디어의 조사, 소문, 위협에 마침내 두 손을 든 것뿐이다. 미디어의 압력은 그의 100세 생일과 최근의 사망을 계기로 절정에 달했다. 기자들이 우리 집 밖에 진을 치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댔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내가 뭐 그리 특별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당시 남부에서는 수천 수만의 흑인들이 안고 있던 사연이다. 샐리 헤밍스와 그의 연인인 토마스 제퍼슨의 관계를 두고 대단한 일처럼 떠들지만 그것은 노예제도 시절에 흔히 있던 일의 한 예일 뿐이다. 그런데도 샐리와 내가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은 우리들의 삶에 백인 남성이 관련이 되어서 있어서가 아니라 그 백인 남성들이 미국의 역사적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개인적인 관계로 보았지 정치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는 정치가로서 그 시대에 그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인종분리에 대한 그의 견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었다.
내가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인종분리가 더 빨리 끝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주지사 자리나 상원의원 자리를 잃어버렸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그 자리는 또 다른 인종분리주의자에 의해 채워졌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서몬드의 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나는 출생증명서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1925년 사우스캐롤라이너, 에이큰에서 산파의 손에 태어났다. 출생 신고는 된 적이 없다. 남부 시골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생 동안 특별한 날이면 그가 나와 나의 아이들에게 보낸 선물, 돈, 편지, 직접 방문들을 보면 그가 나의 아버지라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나는 내가 받은 서신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기자들이 서류 더미에서 내가 보낸 편지를 찾아냈다.
서몬드 가족이 내가 그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내 아버지가 누구냐를 두고 긴 논쟁이 오고갈 일이 없어졌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맺힌 감정이 없다. 평생동안 그는 나와 내 가족에게 친절하고 관대했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단지 사실을 밝힐 뿐이다.
에시 매 워싱턴 윌리엄스/전직 교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