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총선은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긋는 중대 사건이다. 우선 원내 소수당이던 열린 우리당이 의석 수를 3배로 늘리며 16년만에 처음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는 거대 여당이 됐다.
그러나 이런 숫자적 변화보다 더 큰 것은 해방 후 지난 수 십년간 한국 정치를 지배해 왔던 보수정치의 기본 틀이 깨졌다는 점이다. 개혁 정당이 거대 여당이 됐다는 점도 그렇지만 진보를 기치로 내건 민주노동당이 첫 원내에 진입했다는 데서 이는 뚜렷이 드러난다. 이와 함께 ‘3김 정치’로 불리는 구세대 주도 세력은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게 됐다. 자민련과 민주당의 몰락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번 총선으로 그동안 한국을 시끄럽게 했던 탄핵정국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한다. 이번 총선은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과 재신임에 관한 국민의 심판이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중립이라 하나 국민의 뜻이 분명해진 지금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지지하는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노 대통령은 이번 총선에서의 승리로 강력하게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모멘텀을 얻게 됐다. 일단은 ‘상생의 정치’를 펴겠다고 밝혔으나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으로 봐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하기보다는 그동안 수의 열세로 당한 수모를 갚겠다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한다.
열린 우리당은 ‘개혁의 정치’를 표방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펼 지는 불투명하다. 당 구성이 운동권과 직업 관료 등이 혼재해 있어 ‘잡탕’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열린 우리당은 내실 있는 정책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인 폄하 발언으로 표를 깎아먹은 정동영 체제가 유지될 지도 불확실하며 노선을 놓고 당내 투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열린 우리당이 다수당이 됐다고 해 대외정책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노무현 정부의 근본 성격이 반미라기보다는 온건한 친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당내 일각에서 이라크 파병을 철회하자는 주장이 나오겠으나 이는 노 대통령이 통제할 수 있으리라 본다.
전통적으로 보수는 자본, 진보는 노동 편이라는 게 통념이지만 한국에서의 보수와 진보는 북한 문제에 관해 반북과 친북으로 나뉜다. 포용정책을 기조로 해온 열린 우리당이 승리함에 따라 대북 유화 정책은 더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한나라당의 변신이다. 김영삼과-이회창-최병렬로 이어져 오던 한나라당의 중심 세력은 이번 선거를 통해 박근혜 체제로 바뀌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도 세대 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박근혜는 한때 탄핵 역풍으로 벼랑 끝에서 섰던 한나라당을 정부 여당에 맞설 수 있는 제2당으로 지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일단은 새 지도자로 자리 굳히는데 성공했다. 앞으로 이를 건전한 보수 정당으로 바꿀 수 있느냐에 박근혜와 한나라당의 운명은 걸려 있다고 봐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국은 이번 총선을 계기로 색깔이 분명한 진보 보수 양당 체제로 재편됐다. 열린 우리당과 한나라당 모두 국민의 뜻을 헤아리는 정책 정당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김용직
성신여대 정치학·UCLA 객원교수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