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숭 목사 (콘트라코스타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
아이들 어렸을 때 이야기다. 큰애(딸)가 일곱 살 둘째(아들)가 다섯 살쯤이었을까? 마냥 예쁘기만 하던 아이들이 서서히 말을 안 듣기 시작하면 부모들은 자기 편하게 ‘미운 세살’, ‘미운 다섯 살’, 이런 식으로 갖다 붙이는 것을 봤다. 그렇다면 그때 우리 아이들도 ‘미운 일곱 살’, ‘미운 다섯 살’의 불명예스런 꼬리표를 단 셈이었다. 하루는 큰애가 제 엄마한테 반기를 들었다. “이건 안 돼 저건 해야 돼”라는 소리에 자기들의 자유가 꽤나 억압당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할 일 좀 안하고(우리 집에선 당일에 해야 할 숙제[requirement]를 ‘할 일’이라고 부른다) 맘대로 좀 살았으면 좋겠다”며 항변했다. 그러자 애 엄마가 이때다 싶어 되받아쳤다. “그럼 집 나가서 니네들 맘대로 한번 살아볼래?” 이 말을 들은 큰애는 웬 용기였는지 “OK! I will”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직은 주제 파악할 나이가 안 된 둘째를 선동했다. 둘째는 이내 쉽게 넘어갔다. 뒤이어 엄마가 말했다. “자 얘들아 이제 짐 싸라. 밖에 나가서 살고 싶은 만큼 짐 싸. 옷도 싸고 음식도 싸고 수건도 싸고.... 아 참 담요도 가져가야지?” 얘들은 신이 났다.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얘들 엄마는 친절하게 가방까지 내주며 음식과 함께 짐 싸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 짐들을 바깥마당에 다 내놨다. 그러나 마냥 신나던 아이들이 엄마가 정말 짐까지 싸서 바깥에 내놓는 것을 보고 겁이 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정도 나이면 아직은 자존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가 아닌가? 큰 애는 애써 태연한 척 하면서 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더 확실한 교육을 위해 친절한 어조로 포옹까지 동원해 배웅하고 문을 걸어 잠갔다. 얘들도 “bye bye, see you later Mom” 인사 다하고 길을 떠나는 척 했다. 그러나 애써 태연했던 ‘마의 20분’이 흘렀을까? 그때가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었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싶었는지 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 오늘은 늦었으니까 오늘 하루 밤만 자고 내일 떠날게.” “생각해보니까 돈이 좀 부족한 것 같아.” “엄마, 우리는 운전을 못하잖아.” 얘 엄마는 우습기도 하고 좀 심하다 싶기도 했지만 본 목표달성을 위해 좀더 인내했다.
“아니야! 엄마아빠 없이 니네들끼리 한번 살아봐. 그러면 좋겠다며. 할 일도 안 하고...” 결국 둘째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엄마 나 안 갈래. 엄마하고 살래.” 울음은 쉽게 전염되는 법! 자존심과 선동으로 버티던 큰애까지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잘못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날 밤 우리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교회 식’으로 말하자면 그날 밤 우리 집은 갑작스런 ‘가족부흥회’를 경험했다.
필자와 필자의 아내는 그 사건으로 인해 ‘참 자유’의 개념을 확실히 이해했다. 자유라는 것이 인간 각자의 본성대로 행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본성이 어떤 진리적 규범의 제약을 받을 때 자유가 창조된다는 것도 배웠다. 물고기는 물 안에 있을 때, 새는 공중에 있을 때 자유로운 법이다. 물고기가 물이라는 환경이 싫어 뭍으로 올라올 때 순간의 해방은 누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그것이 자기에게 파멸을 가져오고야 말 것이다.
현대인의 자유 개념에도 이 같은 굴절이 존재한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존재한다. 인간의 본성대로 갈 데까지 놔두자는 것이 현대의 자유 개념이다. 국가에서는(특히 미국이) 그러도록 법적 장치까지 마련해주며 보호를 도모한다. 물론 그 유익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이 있다. 개인의 인권이 충분히 보장될 때 갖는 혜택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역기능도 만만치 않다. 그 편의를 악용해 조직의 안정을 파괴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난다. 최근 가주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직장상해보험 악용사례나 동성애자 결혼이 그 경우다.
다시 돌아본다. 물론 그럴 리도 없었겠지만 그때 우리 아이들이 소위 ‘그들의 자유’를 찾아 정말 집을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걔들은 물론, 부모인 우리가 겪게 될 비참함이란 상상하기도 끔찍하다. 순간의 자기충동적인 자유는 곧 방종이다. 그것이 낳는 관계의 절단과 폐해의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한계를 잘 모른다. 꼭 목사여서 하는 말은 아니다(목사는 “목사니까 그러지”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편이다). 보편인의 생각에서 곰곰이 생각해봐도 정말 그렇다. 창조주를 떠난 피조물의 자유는 허구다. 그 자체가 비극이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돌봄 아래 있을 때 풍성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응접실에서 깔깔대며 웃고 노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이 내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 이미 행복하다. “아 이게 자유라는 거구나!”는 생각과 함께. 이제 이를 좀더 확대시켜 본다. “아하 난 지금 하나님 안에 있구나!” 가만 살펴보니, 필자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소속되어 있고(수평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있음을(수직적으로) 갑자기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행복하고 자유롭다. 그래서 오늘밤은 두 다리 쭉 뻗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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