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만원버스 같은 책장을 정리 하다가, 약간은 누렇게 변색이 된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찾아냈고 ‘작은 파도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되었다.
“저번 날 멋진 이야기를 들었네.”
모리 선생님이 말한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나는 기다린다.
“그래, 넓고 넓은 바다에서 넘실대는 작은 파도에 대한 이야기야. 파도는 바람을 맞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 그러다가 자기 앞에 있는 다른 파도들이 해변에 닿아 부서지는 것을 보았어.”
“‘하나님 맙소사, 이렇게 끔찍할 데가 있나. 내가 무슨 일들 당할지 저것 좀 봐!’ 파도는 말했지.”
“그때 다른 파도가 뒤에서 왔어. 그는 이 작은 파도의 우울한 기분을 알아차리고 물었어.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어?’”
“아까 그 작은 파도가 대답하지. ‘넌 모를 거야! 우린 모두 부서진다구! 우리 파도는 부서져 다 없어져버린단 말이야! 정말 끔찍하지 않니?”
“그러자 다른 파도가 말하지. ‘아냐, 넌 잘 모르는구나. 우리는 그냥 파도가 아냐. 우리는 바다의 일부라구.”
우리 인생은 아무렇게나 떠밀려와 한낱 허망하게 포말로 흩어져버릴 수 있는 파도가 아니다. 바위에 부딪치고 부대끼는 고통을 견뎌낸 모습으로 다시 거대한 바다에 합류하는 것이다.
부서지기를 반복하면서 더 힘찬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주 가끔 일이 끝난 저녁시간에 동네 영화관에서 만나 함께 영화를 보는 친구가 있다. 혼자 몸으로 4명의 자녀를 양육하느라 지칠 법도 한데, 여전히 팔딱거리는 에너지를 가진데다 씩씩하고 시원한 성격이어서 갈증해소용 음료 같은 친구다.
얼마 전 이라크 전에 파병되었던 그 친구의 아들이 꽤 큰 부상을 입고 7개월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폭탄 파편이 몸의 여기저기에 박혔는데 특히, 내장(內臟)속에 깊이 박힌 것들을 다 제거하지 못해 강력한 모르핀으로도 잠재울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다 귀향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좋은 의료진에게 수술을 받고 몇 주 사이에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어 다행이라며, 아들이 다시 이라크로 돌아갈 계획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하와이에 있는 삼촌 집에서 온 가족이 모이기로 했다며, 아들도 그 때까지 돌아온다고 했으니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 둬야겠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처음 부상 소식을 접하고서 이국 땅에서 신음하고 있을 아들의 상황을 얘기해 줄 때보다 한껏 여유로워진 음성으로.
그러나 나는 느낄 수 있다. 지난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얼마나 그녀가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걱정과 고통을 다스려왔을 지를.
말끝에 흘리는 명랑한 듯 헛헛한 웃음 속에는 맨 살에 유리 조각이 박힌 것 같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인생역정에 가로놓였던 수많은 아픔과 힘든 시간들을 대할 때마다, “그래, 너 역경아! 고통아! 올 테면 와봐라.
내 너와 잘 지내보리라. 잘 넘어가 주마”라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아픔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안다.
느티나무가 새 봄에 스스로 껍질을 벗고 꽃을 피우듯 우리를 덮치는 역경을, 고통을 차근차근 잘게 잘게 씹어서 다 소화해 버리고 더 풍성한 인성의 열매를 맺어갔으면 좋겠다.
힘들어 견딜 수가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인을 하고 서로를 물어뜯고 있다.
이러 때일수록 ‘작은 파도’처럼 겁먹지 말고 큰소리로 외쳐보자. “역경아, 이번엔 무슨 선물을 준비했니?”
성영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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