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 담글 때는 메주가 좋아야 하고, 메주가 좋으려면 콩이 좋아야 한다. 좋은 장을 만들려면 그 외에도 많은 요소가 필요할 것이다.
장을 담글 때 할머니는 장독 뚜껑을 열고 망사를 씌워 파리는 들어가지 못하고, 공기만 통하게 하셨다. 비가 올 것 같으면 장독을 덮고, 맑은 날이면 열어두곤 하시며 정성스레 관리하시는 것을 보았다.
하루는 숯을 넣으시며 이것으로 독을 제거한다고 하셨다. 며칠 후에 할머니와 함께 장독을 들여다보니 구더기가 득실거렸다. 나는 장을 다 버려야 한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아랑곳 않으시고 둥근 철사에 모시를 씌운 잠자리 채 같은 ‘걸름 조리’로 구더기를 걸러내셨다.
어린 나는 다시는 장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할머니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장을 담그려면 구더기가 생기고, 구더기만 없앤다고 좋은 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뒤로도 장은 계속 먹고살았는데, 십대가 되어서 또 그 ‘구더기 강박’이 머리를 스쳐갔다. “항생제를 넣으면 구더기가 안 생길 것이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곧장 잊고 말았다.
할머니 가신지 40여 년이 지났는데 “구더기만 없앤다고 맛있는 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는 할머니 말씀이 생생하다.
인턴시절에는 “우울증이 심해서 일을 못하겠다”며 꾀병을 부리며 국고를 축내는 사람들이 눈에 거슬렸다. 그때 나는 지도 교수에게 건의했다. 꾀병환자들이 사회보장 장애인 보조금을 타며 놀고먹으니, 정신과 진단 규정을 강화해서 이런 부조리를 막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 교수의 대답은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상당수의 진짜 환자들도 함께 희생될 수 있다”였다.
“썩은 사과만 골라낸다고 좋은 사과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라는 글이 미국 의학지에 실린 적이 있다. 의료 보험 사기를 치는 비양심적 의사들을 규제하기 위해서 보험신청 규정을 대폭 강화하고, 차트 검사와 신청코드 세부화를 통해서 보험사기가 힘들도록 했는데, 그 결과 인술을 베푸는 좋은 의사들에게만 부담이 더 커졌다는 내용이었다.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도 있고, 탈법 위법 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런 자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때마다 법을 잘 지키는 착한 사람들도 함께 고달파진다.
오히려 바른 삶에 관심 없는 자들은 새로운 탈법을 고안해내어 규제를 비껴간다. 그래서 세상만사를 법으로만 해결하기는 힘들다.
9.11사태 이후 이민관련 법을 강화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출입국규제 강화는 물론 소위 ‘애국법’에 의거하여 은행구좌를 여는데도 규제가 심하고, 외국에 송금하기도 어려워 졌다 한다.
모국에서는 반세기전의 친일파 처리에 관한 법을 만든다는 소식도 들린다. 법 규제, 처 벌, 원인규명 등의 강박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결과를 낳는다.
‘구더기 강박’에 사로잡혀서 장 속에 항생제를 듬뿍 넣고 싶었던 나의 십대의 발상과 비슷한 소아적 태도에서 나온다. 구더기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좋은 콩과 잘 뜬 메주 등 좋은 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여러 요소를 잊기 십상이다. 구더기를 잡아내더라도 장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장을 담가도 구더기는 또 생기게 마련인 것쯤은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세상사이다.
그래도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구더기 충동’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뭔가 위기의식을 불어넣고서 해결책으로는 딱 부러지는 흑백논리를 제시함으로써 국민들을 쉽게 선동할 수 있는 단기처방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더욱 새 법이나 새로운 규제를 가하기 전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구더기 강박’의 득실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절실하다.
정균희 UCLA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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