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 20분 경 한국행 비행기는 LA공항을 이륙하고 있다. 지구를 떠나 공중을 나는 비행기를 아무런 불안과 두려움 없이 탈수 있는 것은 문명에 대한 타성적인 신뢰감 때문이었을 게다.
좌석 앞 스크린위로 비행기는 가주 해안선을 따라 북으로 비행하고 있다. 이미 잠 잘 시간을 놓친 터라 등을 기대어 잠을 청해본다.
5년 만인 이번 모국방문은 내 나이가 칠순에 이르러 있어 한국에 있는 팔순을 넘긴 집안 어른들과 와병중인 몇몇 친족들과는 어쩌면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 좁은 의자 안에서 몸을 뒤척이다 지쳐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비행기는 이미 베링해를 깊숙이 들어서 있었다.
승객들은 모두 잠자는 듯 보이고 기체 안은 심야의 적막감마저 감돈다. 문득 나만이 깨어있다는 불안한 외로움에 소연해진다. 비행기는 고도 1만1,000미터의 광활한 밤하늘을 한 점의 불빛만 깜박이며 외롭게 비행하고 있다. 이미 육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비상시에는 어디에도 착륙할 수 없을 만큼 태평양 한복판을 날고 있는 것이다.
나는 폐쇄된 공간 속에 포로처럼 갇혀있고 생명력은 무기력하게 위축되고 있다. 방정맞게 시리 절대적 순간으로 이어지는 현재를 의식하며 시간의 흐름만을 기다려야 하는 인간의 무능함이 비참하게 느껴진다. 비록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해도 새처럼 공중을 날 수 없지 않는가. 인간이 이처럼 절대자 앞에서 지극히 작고 무력한 한 순간의 존재임을 인식한 적은 없었다.
어느덧 비행기는 나와 하나가 되어 고독을 반추하며 용기와 인내로 비행하고 있다. 가끔 역풍에 동체가 흔들릴 때마다 최선을 다하는 비행기의 고독감이 내 몸 깊숙이 전달되어 온다.
죽음이란 블랙 홀은 항상 생명의 곁에 있고 그 생명력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생명선에 이르기까지 팽창해간다. 그러나 지금 나는 출구가 없는 공간 속에서 내가 원하는 운명의 패를 갖고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시간의 흐름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동안 주어진 생명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고 너무 오만하고 당돌했던 것이 부끄러워진다. 눈만 뜨면 큰소리 치고 증오와 갈등을 씹어온 인생이 아니었던가
다시 졸음에 빠져 있다가 눈을 떠보니 스튜어디스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드디어 비행기는 서울 가까이 다가와 있고 그제야 움츠려 있던 생명력이 기지개를 편다 저 사람들은 지구위로 내리면 또 죽일 놈 살릴 놈하고 싸움을 시작하겠지.
곁에 있는 블라인드를 올려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려다본다. 희뿌연 여명을 뚫고 땅위의 찬란한 불빛이 눈에 들어오고 산과 들이 보인다. 어느새 나는 비참했던 기억에서 벗어나 내가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환희가 가슴 가득히 메워온다. 다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으리라.
남진식/사이프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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