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84세가 되신 장인께서 돌아가셨다.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몸의 다른 부위에서도 이상증세가 발견되어, 입원한지 11일만에 조용히 삶을 마감하셨다. 병상에서 만난 장인의 얼굴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주름살이 깊이 패인 한국의 한 많은 생존의 세대의 모습이었다. 주사바늘을 꽂아 손등이 온통 멍 투성이인 장인의 손을 가만히 쥐면서, 자식한테 폐가 안 되려고 끝까지 고집부린 이 불쌍한 세대를 꼭 껴안아주고 싶은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격동의 세월을 보낸 모든 어른들이 그렇듯이, 장인 어른도 3.1 운동이 일어난 다음해에 태어나, 일제치하에서 수모와 설움의 삶을 살았고, 해방되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지만, 좌익과 우익의 갈등으로 우리끼리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며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시작된 이 증오와 갈등은 한국전쟁으로 비화되었고, 한반도는 폐허로 변하고 수백만이 희생된 피비린내로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휴전이 되어 숨을 돌릴 만 하니까 이제는 군사정부의 철권정치가 시작되었고, 죄가 없어도 정보부와 보안사, 청와대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삶을 살았다.
그 동안 경제발전이라는 대 명제 아래, 정말 죽어라 일하며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했는데, 이제는 어찌된 세상인지, 자기들을 잘 살게 만들어준 데 대한 감사는커녕, 시대에 뒤떨어진, 곰팡이 냄새나는 수구세력으로 몰리며, 마지막 수모를 당하고 있다.
늘 가슴조리며 살아 온 세대, 사랑하는 딸이 정신대로 끌려가고 창씨개명을 당해도, 그저 목숨 유지를 위해 미소를 지어야만 했던 세대, 낮에는 우익, 밤에는 좌익으로 행세하야만 했고, 비오듯 쏟아지는 폭탄을 피해 남을 밀쳐 내며 한강다리를 건너야 했던 세대, 권력에 아부하고, 한탕주의에 오염된 세대, 주여, 할렐루야를 외치며 성경 위에 손을 얹고 태연하게 거짓맹세를 할 수 있는 세대,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해야만했던 세대가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있다.
온갖 의료기구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이 생존의 세대의 모습을 보며, 이 분들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길래 이렇게 험한 세상을 살아야만 했을까? 죄라면 한반도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죄밖에 없는 데... 그 죄 값이 이렇게도 혹독하고 처참할 수가 있을까? 그저 “죄송해요. 이제는 고통과 눈물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지내세요.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시고 빨리 가세요” 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갑자기 이 생존의 세대가 거인처럼 보이고 그 앞에서 깨갱거리는 나의 모습이 부끄럽기만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모든 삶이 이 분들 덕분인데, 우리는 이 분들에게 감사하기보다는 비판하면서 손가락질만 해 온 것은 아닌지, 마치 의인인 척, 고상한 척, 지식인인 척... 이 분들의 생존을 위한 뼈아픔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의 나는 있을 수가 있을까? 그저 “죄송해요. 고마워요. 너무 고생하셨어요” 꼭 껴 앉고 함께 울고싶다. 생존을 모르고 살아 온 나는 과연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가? 어쩌면 나는 생존의 세대들보다도 더 못한, 창피한 삶을 살고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도 생존을 위해 허우적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2004년을 마감하며 생존의 세대가 마지막 긴 숨을 내쉬고 있다.
찰스 김 한미연합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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