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지난 한 일간지 외신란에 실린 한장의 사진을 아직도 기억한다. 수만명의 힌두교도들이 갠지즈강에 가설된 부교를 지나는 장면의 사진이었다. 그들은 과거의 죄를 씻기위해 갠지즈강에 행렬지어 찾아나왔다. 그 강에 몸을 씻으면 온갖 죄가 용서함받는다는 그들나름대로의 회개의식을 실행키 위해서였다. 사진안의 다리위를 가득 메운 힌두교도들은 과연 무슨 죄를 지었길래 끝없는 행렬을 지어 강가를 찾아가는 것일까. 비록 종교, 문화, 삶의 철학, 내용이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나름대로 죄를 씻기위해 떼지어 몰려가는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충격으로 와 닿았다.
사실 허물과 죄는 누구에게나 있는데, 양심에 가책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데 그럼에도 힌두교도들의 죄씻는 사진이 마음에 충격을 주었던 것은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데 인색한 우리의 모습이 부끄러워서였다. 회개함에 가난한 우리 기독자들, 이런 표현을 쓴다면 지나친 것일까 ? 기독자일지라도 인간의 한계상황, 무지, 연약함등으로 죄짓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성경도 하늘아래 의인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기에)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은 응당 기독자로서의 마땅한 바인데 말이다. 기독자의 문제는 죄인됨이어서가 아니라 죄를 회개치 아니함이어서이다. 세상에서 하기 힘든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미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고 둘째는 싫은 사람을 받아 드리는 일이며 세째는 무사한 중에 회개하는 일이다라고.. 오늘의 기독자들이 과연 힌두교도보다 죄씻음에 둔감할 정도로 정녕 회개는 힘든 것일까 ?
회개는 실행하기도 쉽지않지만 설교주제로 선택하기도 어렵다. 대부분의 이민성도들은 축복, 용서, 사랑, 평안, 위로등에 관한 편안한 설교를 즐겨듣는다. 반면에 심판, 의, 헌금, 회개등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필요성을 알면서도 회개는 그만큼 행하기도, 전하기도 어렵다. 헌데 어려우니만큼 회개는 고귀한 행위이며 성숙한 인격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회개는 두 방향을 동시에 보게 한다. 과거를 눈물고인 눈으로, 뉘우침의 눈으로 보게 한다. 그리고 미래를 감격과 희망의 눈으로 보게 한다. 죄가 있는 한 여전히 불행, 아픔이 있다. 죄는 자신을 파괴하고 형제, 가족, 이웃을 나눈다. 마음을 찢고 행복을 찬탈하고 영혼마저 무덤속에 가둔다. 지금 당신영혼은 어디 있는가 ? 개인사이던 민족사이던 우주사이건간에 불행을 뛰어넘어 밝고 푸른 미래의 지평을 열어가는 유일한 비책은 회개하는 것이다. 더 이상 죄를 삶속에 가두지 말자. 생각, 언어, 행위등 삶의 전 영역에서 회개운동을 벌여나가자. 회개는 주님이 원하는 시대적요청이다.<프리몬트 로고스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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