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온도가 100도를 웃돌았던 어제 점심시간이다. 타운에 있는 냉면 집은 순서대로 번호를 타고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식탁에 앉을 정도로 붐볐다. 그러나 자리에 촘촘히 앉은 사람들에 비해 실내는 조용하고 쾌적했다. 냉면을 후루룩 후루룩 입맛 다시며 먹는 소리만 가끔 들려왔다. 내가 자리에 앉고 나서 잠시 뒤에 한 자리 건너식탁에 다섯 식구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들아이 둘에 딸아이 하나, 중학생인 듯한 남자아이와 막내로 보이는 머슴애, 예쁜 소녀가 중간 아이인 듯 누가 보아도 행복한 가정 구성원이다.
처음부터 그 가족에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냉면 맛의 진미를 알지 못하는 나는 비빔밥을 시켜 놓고 고추장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그때, 저편에서 두 옥타브 정도 높은 화난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한두마디 하다가 그만 두겠거니 무관심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이사이 들리는 말 중에는 “시끄러워”가 주로 이고 “애들이 무슨 냉면을 한 그릇씩 먹느냐 반 나눠주어라”도 있다.
좀 그치려나 하면 다시 이어진다. 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듣고만 있다. 예쁘장한 얼굴엔 분노와 슬픔이 물결처럼 퍼지고 있다. 토요일 점심 나들이를 망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해 못할 것이 있다면 사내아이들은 아버지의 성난 음성이 식당 안을 휘젓고 다녀도 아랑곳없다는 눈치다. 일상이 그랬을 거라는 짐작이 간다. 여전히 장난을 치고 있다. 여자아이만 엄마 눈치를 보며 시무룩히 앉아있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인간의 만남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가 운명적 만남이요, 둘째가 선택적인 만남이요, 셋째는 우연적 만남이다. 오늘은 운명적인 만남을 생각하고 싶었다. 그 아버지와 가족들을 보면서 인간이 살면서 많은 만남의 기회를 갖지만 부모와의 만남은 운명적 만남이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초적인 만남인 것이다. 피로 맺어진 것이 부모와 형제 자매인 것이다.
인간의 몸에는 네 가지의 액체가 있다. 피, 눈물, 땀, 호르몬 이들 가운데 제일로 진한 것이 피가 아닌가. 제일 중요한 것도 피다. 피는 곧 생명이기도 하다, 원래 한자로 아비부 자는 손에 회초리를 들고 있는 상형문자라고 하고, 어미모 자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양을 상형한 글자라고 한다.
아버지라는 말처럼 고마운 말이 없고 어머니라는 말처럼 아름다운 말이 없다. 부모의 만남에서 나의 존재가 시작된다. 더하여 깊은 만남은 형제 자매인 것이다. 형제 자매는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가지요 줄기인 것이다. 나의 언니. 나의 누나. 나의 형. 나의 동생은 자식이나 부모와 똑같이 피로 얽힌 관계요, 피로 맺은 만남이다. 잘나고 못나도 어쩔 수 없이 운명적인 만남인 것이다.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없는 피로 얽힌 관계가 부모의 형제 자식인 것이다.
점심을 다 먹은 뒤에도 잠시 더 앉아 있으면서 그 가족을 살펴보았다. 물론 눈치 못 채도록 말이다. 견디다 못한 부인이 자리를 옮겨 앉고 여전히 양미간을 찡그린 아버지는 열심히 냉면을 드신다. 아이들에게 화가 나서 부인한테 화를 내는 건지, 정말 부인한테 속상한 일이 있는 건지 이편에서는 알 수가 없다.
살다 보면 화날 일이 한 두 번이랴, 바람이 있다면 바깥에서의 식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 조용조용 의논할 수는 없었을까? 사정이야 있었겠으나 공공장소였음이 안타깝다는 얘기다. 한문 글자에 상형 된 것처럼 회초리를 들어 자식을 가르치는 아버지처럼 참된 가르침을 주었으면 싶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인륜이기도 하지만 천륜이요 운명적인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 마음에 아버지가 인자하고 부드럽고 좋은 아버지로 자리 잡기를 진정 바라고 싶다.
홍민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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