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의사 김익창 선생 내외분과는 동향인데다 연배도 비슷해서 만나면 곧 감동스런 화제가 꼬리를 문다. 계절은 6월, 화제는 한국 동란 때 이야기였는데 그는 50년 8월에 보안원에게 끌려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서울의대 예과 학생이었던 그는 영어 구사능력이 뛰어나 UN군의 통역관으로 징집이 되어 38선을 넘어 북상해서 함경도까지 진군했었다. 피난민 10만 명을 흥남 부두에서 데리고 나온 ‘한국의 모세’ 현봉학 선생 이야기를 김 선생으로부터 듣고 감격하였다.
한국의 ‘모세’ 현봉학 선생은 연세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근무하다 군의관 겸 통역장교로 참전하였다. 파죽지세로 원산 함흥을 점령하며 북상했으나 물밀듯이 내려오는 중공군으로 UN군은 불가불 철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은 무기나 군수물자를 중공군의 손에 넣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군은 서둘며 흥남 부두를 떠날 준비에 바빴다. 그러나 현 선생은 함경도 일대에서 국군이 들어오자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했던 사람들을 그 땅에 놓고 떠날 수는 없었다. 인민군이 이들 가족까지도 몰살시킬 것은 뻔했다. 그는 떼를 쓰며 애걸도 해가며 유창한 영어로 끝까지 간청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보라. 요구할 것을 요구해야지. 탱크도 남은 군수물자도 미군들도 싣기에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 아닌가.” 완강히 거절당했다. 현 선생은 속이 탔다.
이때 나타난 의인이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이었다. 현 선생과 알몬드 장군은 배가 떠날까봐 며칠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한, 짐을 이고 지고 어린 아기를 업은 피난민 중에 장정들을 골라 군수물자를 배에 싣는 일을 시키고 배에 실린 군대장비와 탱크 밑에, 위에 옆에, 공간이 있는 곳은 피난민을 봉지에 멸치 담듯 실었다. 그 때가 50년 12월 19일이었다.
배가 부웅 하고 고동이 울리자 피난민들은 안도의 한숨과 눈물을 쏟으며 언제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 울었다. ‘레인 빅토리’호에 7,000명. 버지니아 빅토리에 1만4,000명. BM 50에 4,300명, LST 6척에, 모두 9만8,100명을 무사히 자유의 땅 거제도에 내려놓았다.
해병대 지휘관이었던 김성은 중령은 그때를 회상하며 전장에서 자기의 혈관에 호수바늘을 꽂고 부상자의 혈관에 직접 수혈하는 현 선생의 이마에 솟은 땀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다. 10만 명의 피난민 중에는 지금은 미주 땅에서 자리잡고 사는 분들도 계시다고 했다.
아! 6.25. 지금까지도 미완의 서러운 6월이기는 하나 현 선생과 알몬드 장군과 미국용사 5만4,200여명의 생명을 앗은 곳에서 우리 피난민 10만 명을 살려낸 인도주의 국가 미국 땅에 하나님의 축복 있기를 빈다.
정옥희
미주 문협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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