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나이를 의식하는 데는 여러 가지 경로가 있지만 내게 그중 하나는 ‘군대’였다. 여성들에게도 군대의 추억은 있다. 병영 밖에서 겪는 군대 경험이다.
스무살 전후 우리 친구들에게 ‘군대’는 대단히 절실한 현실이었다. 남자친구나 애인이 군대에 입대하면서, 대개 평생 처음 가장 아픈 이별, 깊은 그리움을 겪어내야 했다. ‘그’가 배치된 부대가 전방이라도 되면 1박2일이 소요되는 면회를 위해 부모님께 외박을 허락 받느라 온갖 지혜를 짜내야 했고, 젊은 날 햇살 화려한 무수한 주말들을 ‘그’의 휴가 날만 기다리며 가슴 짠하게 넘겨야 했다.
대한민국의 여성으로 가슴에 이등병 한 사람 담지 않은 여성이 있을까. 그렇게 군대는 우리의 남자친구나 애인들이 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2-3년 전 서울에 갔더니 친구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아들들이 군대에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남자친구들이 가던 군대를 아들들이 간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의식의 전환이 필요했다. 병사의 애인들을 병사의 엄마들로 바꿔놓은 것은 세월, 바로 나이였다.
지난주 최전방 철책부대에서 총기 난사사건이 일어난 후 한국의 ‘군대’가 도마 위에 올랐다. 군대는 위계질서가 생명인데 요즘 기강이 너무 해이해졌다는 비판, 자유분방하고 개인주의적인 신세대에게 기존의 병영 분위기는 너무 획일적이고 강압적이라는 지적 등 다양한 분석이 나오더니, 차츰 사건의 직접적 원인은 가해자 개인의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상명하복의 지휘체계로 숨이 막히고, 폭언이나 구타로 모욕을 당했다고 해서 누구나 한솥밥 먹던 동료들에게 총을 휘두르지는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30년 전 우리의 남자친구들이 병영 내 무지막지한 구타를 으레 그런 것으로 여기고 일종의 무용담으로 삼았던 데 비해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한국의 친구들이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군대 간 아들들은 고참의 폭력은 물론 모욕적 언사도 분명하게 ‘부당하다’고 느낀다.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고생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라 유약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개개인의 인격을 중시하는 사회 전반의 의식 변화가 더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인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지금 시대에도 벌거벗은 채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까. 백성들이 벌거벗은 임금의 맨몸을 보면서도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권위의 힘이라고 본다. 권위의 상징인 임금이 콩을 보고‘팥이다’라고 하면 백성들은 감히 의심할 생각을 못하고 팥으로 믿게 되던 시절이 있었다. 전통적 권위주의 시대이다. 그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군 총기난사 사건이 핫 이슈였던 지난주 또 하나 관심을 끌던 한국 뉴스는 ‘황혼이혼’이 급증한다는 통계였다. 한국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년 이상 같이 산 부부들이 뒤늦게 이혼하는 케이스가 80년대 초반에 비해 4배나 증가했다.
한국의 이혼법정에 가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고 한다. 어깨가 축 쳐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측은 남성이고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행여 서류미비로 이혼에 차질이 생길까 신경을 곤두세우는 측은 여성들이라고 한다. 이혼을 주도하는 측이 주로 여성이라는 말이다.
요즘의 부부들이 이전 세대보다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부부가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결혼이라는 틀이 유지된 것은 여성의 인내심 덕분인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별 볼일 없는 남성도 집에 가면 하늘의 권위를 누렸고 아내는 그 권위에 복종하도록 사회적 압력을 받았다. 황혼 이혼의 증가는 가정에서 전통적 권위주의가 해체되고 있다는 한 증거라고 본다.
나이나 계급, 직위, 성별이 무조건 권위를 주던 시대는 지났다. 군대에서도,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권위주의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사랑이나 존중, 배려 같은 가치가 그 자리를 메워야 하지 않을까.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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