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백제의 옛 서울 충남 부여읍 시내에 있는 부소산 기슭에 50여 가옥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6.25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인 철부지였다. 어린 나는 6.25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조차 몰랐다. 우리 마을에는 라디오가 있는 집이 한집도 없었으니까 소식을 접할 길이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경찰 아저씨들이 자동차로 돌아다니며 전쟁이 나서 이곳도 인민군이 쳐들어오니 2km 밖으로 빨리 피난 가라고 방송을 하자 조용했던 마을이 수라장이 되었다. 며칠인지는 기억이 없다. 그 날도 우리 집의 일꾼들은 논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뛰어가 그만 두고 빨리 피난 가라고 전하고 나도 집에 와서 형들과 같이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만 등에 메고 피난민 행렬 속에 끼어 5시간 걸어 정착지에 도착, 피난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누구도 먹을 것이 없어 보리개떡 또는 밀기울떡 때로는 굶어 지낸 생활을 밥먹듯 했다. 한달 지나 집에 돌아와 보니 남겨 두고 간 보리 , 밀가루, 그리고 닭들은 하나도 없었다. 인민군들이 다 먹어 버렸다. 돌아온 날부터 저녁마다 마을의 모든 청년과 어린아이들이랑 공회당에 모여 교육이 시작되었다. 북한 찬양의 노래 사상교육을 했다. 나는 어느 날 몸이 아파서 참석을 못해 그 다음날 엎드려 궁둥이를 나무로 맞고 펑펑 울었다. 교육을 밤에 끝내고 아저씨들하고 죽창을 가지고 도로 사거리 보초를 서야했다.
밤에는 누가 대문을 두드리면 온 집안 식구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아버지는 뒷담을 넘어 산으로 피신하고 거의 산에 숨어 계시었다. 이런 시절을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어린 생각에도 왜 동족인데 비참하게 싸워야 하는지를 이해를 못했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한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은 전쟁 속에서의 어려운 생활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겪어 봐야 이해한다. 젊은 세대들이 지난날의 아픈 체험을 잊지 말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엄익청/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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