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과 거품
지난 겨울 한국을 방문했을때 친구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 목사가 설교전 나를 소개하기를 ‘미국에서 성공적인 목회자요 학문적 소양도 풍부하고 인품도 고매한 목사’라 했다. 물론 교인들앞에서 설교자의 권위와 실력을 인정해주려는 따스한 배려였으리라. 헌데 실상은 그렇지못한 나 자신은친구 목사의 소개에 허구의 옷으로 치장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면서도 소개에 걸맞는 목사답게 보이려고 평상시보다 더욱 위엄있고 열성적으로 설교에 임했다. 소개덕인지 성도들로부터 아멘소리는 많이 들었다. 본의 아니게 그날은 성공한 목사가 된 셈이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나는 단연코 큰 목사가 아니다. 교세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실력, 경험, 인품등 그 무엇으로 판단해도 큰목사의 기준에 합한 요소들이 내겐 없다.
요즘 목사님들중에는 영성, 지성, 감성 심지어는 유머감각까지 두루 갖추어 신자는 물론 불신자들에게까지 흠모의 대상이 되고 있는 스타급의 목사들이 적지않다. 이런 분들에 비하면 나는 별볼일없는
작은 종일뿐이다. 작은 자는 작은 옷을 입어야 한다. 크게 보이려고 큰 옷을 입는다고 작음이 갑작스러이 큼으로 바뀌지 않는다. 작은 자가 큰 옷을 걸치면 모양새도 안나고 불편하기조차 하다. 그리고 결국은 제 옷이 아님도 드러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체면 문화에 신경쓴다. 내용보다는 형식, 실상보다는 외형에 치중한다. 실력보다는 배경에 관심갖는다. 이것들은 허상이며 거품인데 말이다. 허상이 사라지고 거품이 빠지면 남는게 없다.
기독자들에게 허상 문화는 없을까? 불행히도 있다. 교회내에도 잘난체, 아는체, 가진체, 심지어는 믿는 체하는 자들이 심심찮게 있다. 예수님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부요하다 했지만 실은 가난했던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말이다.
위선과 허상은 머지않아 그 실상이 백일하에 밝혀진다. 원래 모습이 아닌 것은 결코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보존될 수 없다. 기독자들은 늘상 하나님과 사람앞에정직하고 투명한 존재이어야 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이어야 한다. 성공 못함보다 더 부끄러움은 실상을 감추고 속임이다. 좀 못났으면 어떻고 실력이 모자려면 어떤가? 그래야 하나님이 불쌍하다고 세게 도와주실것 아닌가? 지금은 부족하고 못났지만 노력하고 힘쓰면 장차는 더 나은 모습아니겠는가? 꾸밈보다 실제 그대로가 더욱 아름답다. 그리고 생명력도 있다. 조화보다는 생화가 훨씬 아름답고 생명력있음처럼... 이제 거품, 허례, 허식을 삶 속에서 추방할 때이다. 특히 믿음의 거품을 걷어낼 때이다. 위선적 믿음이야말로 정녕 불신앙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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