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제대로 하나 길거리를 알기나 하나. 어떨 땐 괜히 미국에 왔다는 생각마저 든다니까”
98년 미국에 왔다는 65세의 조선족 이 모씨는 4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올 봄 남편과 함께 친척들이 있는 중국 연변으로 영구 귀국할 것”이라며 미국생활을 푸념했다.
남편이 일용직으로 버는 돈과 함께 베이비시팅 등으로 생활을 겨우 겨우 꾸려 나갔다는 이 여성은 미국생활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인사회를 덮고 있는 중국 물결의 한 축을 차지하는 게 바로 중국동포(조선족)다.
요즘 식당이나 그로서리 등에서 서비스하는 여성들의 억양을 듣다보면 쉽게 중국동포임을 알 수 있다.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워싱턴지역을 중심으로 약 300-400여명의 중국동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주방, 청소, 사이딩, 그로서리 부분에 진출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족 대부분은 가족을 중국에 두고, 단신으로 도미했으며 돈 버는 것의 대부분을 중국으로 보내며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 비전문직에서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이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언어문제와 문화적 충격으로 녹록치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돈을 벌겠다’는 일념은 과거 70년대 초기 한인 이민자들을 능가한다.
이들이 미국을 선호하는 이유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사유재산이 부분적으로 인정되면서 벌어지는 빈부격차를 만회하기 위한데 있다. 또 한때 불었던 한국행 바람이 한국 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시들해진 것도 또 다른 이유다.
때문에 가족들을 남겨둔 채 브로커들에게 3-4만달러의 빚을 지고 들어온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이들이 미국생활 2-3년간 하는 일은 빚을 갚는데 주력하는 것이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래도 중국에서는 꽤 되는 돈을 가족에게 보는 것도 이들이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들의 근검절약은 생활의 필수적인 규범이 돼 버렸다.
인구가 늘다보니 모임도 생겼고 이들을 만을 위한 교회도 설립됐다.
워싱턴에서는 2001년-2004년까지 김동철 목사가 ‘와싱톤조선족선교회’라는 이름으로 버지니아 프랭코니아 소재 중앙그리스도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또 길림성의 연변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3성(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출신의 25여명의 중국동포들이 ‘와싱톤조선족선교회’의 협조아래 2002년 2월 위튼의 우미가든에서 수도권메릴랜드한인회 관계자들을 초청한 가운데 가칭 워싱턴중국동포총연합회를 발족하기도 했었다.
<이창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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