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트계의 큰 별이 졌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의 죽음은 후배 아티스트들뿐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전 세계 예술인들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백씨는 1958년 자신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59년 최초의 퍼포먼스 해프닝 ‘존 케이지에 대한 찬사’로 아방가르드 미술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르며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미술 장르의 창시자의 길을 걷게 됐다.‘글로발 그루브’,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 바이 키플링’ 등 비디오 아트 작품들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예술가의 자리를 굳혔고 레이저 아트란 또 다른 미술 장르를 시도, ‘야곱의 사다리’, ‘사브라임’, ‘전달’ 등 환상적인 레이저 아트 설치작을 발표했다.
피카소, 칸딘스키, 뒤상, 앤디 워홀 등과 함께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인으로 선정된 백남준씨는 한국인 아티스트이기 전에 세계적인 아티스트로서 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었음에도 무명작가들과 함께 전시, 주류 화단에 신인 작가들을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그중 생전 백씨와 함께 2인전을 가졌던 한인 작가로 설치작가 강익중씨와 존첼시아트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설치작가 출신 제니퍼 방씨가 있다.3인치 작가로 유명한 강익중씨는 1994년 백남준씨와 함께 커네티컷 위트니 미술관 챔피언 분관
에서 성황리에 가진 ‘멀티플다이알로그’(Multiful Dialogue)전을 통해 화단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백씨는 전시회를 준비하며 독일에서 위트니 미술관의 각 부문 담당자 3명에게 팩스를 보내 ‘나는 상관없으니 먼저 강익중의 작품을 좋은 자리에 배치하라’고 당부까지 한 일화를 작가 강익중씨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96년 아틀란타 올림픽때 문화제전의 일환으로 백남준씨와 2인전을 가졌던 제니퍼 방씨는 “학생 시절 처음 백선생님을 보았을 때 가졌던 희망이 20년 뒤에 이뤄져 정말 가슴 벅찼었다. 꿈에 그리던 2인전을 준비하던 중 백선생님께서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끝내 나 혼자 오프닝 행사를 가졌던 기억이 떠오른다”며 “당시 철렁했던 가슴이 아직도 생생한데 타계 소식을 들으니 착잡하고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많은 비디오 아티스트들이 나왔지만 백선생님 만큼 거대한 작가는 없을 만큼 비디오 아트계의 전무후무한 큰 별이었다”며 “무명 작가들을 누구보다 아꼈던 분”이라고 전했다.
백씨는 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말도 어눌하고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정신력을 보여줬다.
그는 다양하고 창조적인 힘이 넘치는 뉴욕을 사랑했고 뉴욕에서 40여년간 머물며 불굴의 창작의욕을 불태우면서도 자신이 태어난 조국 한국을 늘 그리워했다.
<김진혜 기자> jh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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