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3년 ‘나비부인’의 주역 소프라노 레오나 미첼(가운데)와 함께. 오른쪽 옆은 나.
취미의 섭렵 끝 만난‘신천지’
오페라 사랑이 열병 차원에 이르려면 발병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나는 어릴 적부터 잡기에 능해 야구를 좋아했고 트럼본 연주에다 피아노도 배워봤다. 한국전 이후 미국문화의 영향으로 팝송도 좋아해 본적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바를 채워주진 못했다.
잡기에 능한 사람은 특기가 없기 마련이다. 사춘기가 되면서 잡다한 활동을 청산하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듣기 시작했다. 대학 입학 후 고전음악에 대한 열의는 더해졌고, 또 새로운 잡기에 빠졌다. 괴테의 시집,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고, 철학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오페라도 베르디로부터 바그너까지 밤새워 들었다. 이 때부터 문제에 봉착했다. 번역서에만 의존했더니 점점 자료가 고갈되어간 것이다. 칼라스의 명언이 생각났다. “더 큰 곳에서는 더 큰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던 어느 해 5월,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입대를 앞둔 나는 당시 명동 시공관에서 공연됐던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보러갔다. 첫 오페라 공연관람이었다. 그날 무대에 섰던 소프라노 현혜숙은 당대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성악가였다. 6년 후 나는 그녀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잊지 못할 경험을 뒤로 한 채 군에 입대했다. 내가 기거했던 조그만 방에 정든 책과 음악을 두고 떠나기가 아쉬웠다. 영적 친구 C와 헤어지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C는 형이 있는 탓에 내게 항상 새로운 소재를 제공해주었다. 고교 졸업 시절, 그와 나는 최면술과 독일 3제국의 흥망관계, 니치와 바그너와의 관계를 주로 토론했다. 말이 토론이지 모든 것이 내가 주장하는 대로 수긍해주지 않으면 설전이 전쟁으로 변해 평화가 찾아오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미군 부대에 배속된 것은 또 다른 행운이었다. 근무시간은 영어공부와 회화, 타자연습이, 근무 후에는 2시간의 피아노 연습과 도서실에서의 독서가 군대생활의 전부였다. 고전음악의 원판과 영문 원서 등등 없는 게 없었다. 공산주의사상에 관한 서적을 읽는다는 걸 상상도 못할 무렵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사상 및 전기도 볼 수 있었고, 음악도 바흐부터 슈트라우스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이즈음 피아노선생 B를 만났다. S대 철학과 출신으로 대단한 영어실력자였다. 내게 피아노와 영어공부를 동시에 강행군시켰다. 나 역시 유럽의 역사사상과 연관된 오페라 감상과 연구를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잡기로 여겼다.
매 주말 외박이 가능했지만, 그 당시 상황은 베르디와 푸치니 일색인 아폴로 음악 감상실을 감지덕지해야할 판이었다. 바그너를 대할 기회란 거의 불가능했다. 지크프리트와 발할라를 접하려면 더 큰 곳에서 더 큰 것을 찾아야 했다.
이주헌/보헤미안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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