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환목사(빛과 사랑 발행인)
1907년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양 도성에 오순절의 부흥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그 부흥의 근원은 1903년 원산에서 의료선교사로 활약했던 하디목사(캐나다 출신)의 ‘죄와 고백과 기도와 성경공부’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의 선교 사업이 부진한 것은 자기의 부족
함에 있다고 회개기도를 드리던 중 강력한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된 것을 동료 선교사와 한국교인들 앞에서 간증하게 됨으로써 한국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붙게 된 것입니다.
4년 후 1907년에 이르러 드디어 평양에서 역사적인 오순절 사건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당시 평양에서는 해마다 신년벽두에 10일간의 ‘겨울사경회’가 열렸는데, 1907년에는 약 1천명의 교회지도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산과 들을 넘어 포장되지 않은 시골길을 걸어서 온 것입니다. 사경회 참석에 필요한 숙식비 일체를 자비 부담해야 했습니다. 낮 사경회는 남자만 참석할 수 있었지만 저녁 집회에는 평양시내 교인들까지 참석하여 1천 5백여 명이 참석했습
니다. 한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등불을 든 성도들의 무리가 장대현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한마디로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집회 초에는 특별한 성령의 임재를 느낄 수 없었으나 은혜로운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선교사들과 한국지도자들의 기도로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는 열기가 달아오르면서 집회가 끝날 무렵에 처음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당시 집회 중에 한국교회지도자들이 서서 개인적인 죄의 고백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회중들이 모두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는 그 집회 현장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배당 여기저기서 수백 명이 팔을 하늘로 향해 벌리고 하나님을 외쳤다.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선교사들은 수개월을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지만 막상 부흥의 불씨가 타오르자 두려워 떨게 되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훼방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의 부흥은 간절한 기도의 소산이었고, 20세기를 통틀어 한국교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 ‘새벽기도회’와 ‘금식기도’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2000년에 이르러 한국 인구의 3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세계 10대 부흥의 역사’ 참조).
한편 전 세계 교회지도자들은 1907년 한국교회의 오순절 부흥운동을 하나님의 역사로 인식하였습니다. 그 예로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협의회는 “한국의 오순절 성령운동은 진정한 성령운동이었다. 10년 만에 한국교회의 성도수가 4배에 달했기 때문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907년 평양 도성에 임했던 하나님의 영광이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다시 한 번 우리의 조국에 임하시도록 복음전파와 회개운동에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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