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 대학살’ 진실도 묻히나‥자살흔적 없어 심장질환 등 돌연사 가능성
다른 주요인물2명 도피중…전범재판 퇴색 코소보 등 정의를 세울 기회 사라졌다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64) 전 유고연방 대통령이 11일 오전 네덜란드 헤이그의 유엔 구치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990년대 자행된 발칸반도 유혈 사태의 진실도 미궁에 빠지게 됐다. 옥사 소식을 접한 세계는 실망, 애도로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밀로셰비치를 수감해온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는 자살의 흔적이 없다고 밝혔다. 의료진은 평소 앓아온 심장질환과 고혈압으로 인한 돌연사 가능성을 제기했다.

반면 밀로셰비치의 변호사는 ‘혈액에서 강한 약들이 감지됐으며 그들이 나를 독살하려 한다’는 자필 편지를 사망 하루 전 받았다며 독살 의혹을 주장하고 나섰다. 밀로셰비치는 지난달 치료를 위해 러시아 이송을 신청했으나 재판소는 기각했다.

ICTY는 독살 및 자살설이 확산되자 12일 세르비아_몬테네그로 법의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헤이그에서 네덜란드 법의학연구소(NFI) 주도로 부검을 실시했다. 10일 밀로셰비치를 면회한 세르비아 사회당 소속 밀로라드 부셀리치는 ‘그들은 나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란 그의 단호한 말이 유언이 됐다고 말했다.

부검이 끝나는대로 치러질 장례의 장소는 가족들간 의견대립으로 결정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밀로셰비치의 부인 미라 마르코비치와 아들 마르코는 밀로셰비치가 러시아에 묻히길 원한다고 세르비아 언론을 통해 밝혔다. 밀로셰비치 집권 당시 권력 남용 혐의로 세르비아 법원에 기소돼 있는 이들은 장례 참석을 위해 세르비아에 입국하는 순간 체포될 처지다.

반면 밀로셰비치의 동생 보리슬라브는 그는 세르비아의 아들이므로 세르비아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고 딸 마리자는 고향 몬테네그로에서 장례를 치를 것을 주장하고 있어 결정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밀로셰비치는 1989년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2000년 실각하기까지 약 12년간 발칸반도를 전쟁과 인종청소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코소보 전쟁 등 90년대 발칸에서 일어난 66건의 참상이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연방 지배를 추구하는 그에 의해 촉발됐다.

ICTY는 2001년 전쟁과 반 인륜범죄, 보스니아의 무슬림 7,500여명 학살 혐의를 적용해 그를 기소하고 수감했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재판은 올해 말 종신형 선고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재판에서 밀로셰비치는 자신의 행위는 유고 법과 자위권에 따른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ICTY는 허술한 신병 관리로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옛 유고연방이었던 보스니아_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코소보 등에선 정의를 세울 기회가 사라졌다고 애석해 했다. 밀로셰비치가 수감 생활한 유엔 구치소 감방은 가로 5㎙ 세로 3㎙ 크기에 전화 컴퓨터 TV 샤워시설이 갖춰진 ‘호텔급’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ICTY에 의해 기소된 전범 중 모두 7명이 옥중에서 병사 또는 자살했다. ICTY는 현재 기소자 140명 가운데 사망한 11명을 제외한 45명에 대해서만 재판을 확정지었으며 9명은 아직 도피 중이다.

ICTY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옛 유고연방에 자행된 반인륜 범죄를 단죄하기 위해 2차 대전 전범 처리 법정 이후 처음 설치된 국제 법정이다. 이후 르완다 탄자니아 시에라리온 캄보디아 동티모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문제에도 국제법정이 마련됐다. ICTY에는 한국인 권오곤 재판관이 활약하고 있다.



이태규 기자 tg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