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국의 한 TV 토크쇼를 보던 필자는 놀라운 장면을 접했다. 남자 진행자가 여자 출연자에게 “오늘 아주 예쁜 치마를 입고 오셨네요”라고 말하자 이 여자 출연자는 농담이랍시고 “어머, 촌스럽게 치마가 뭐예요? 스커트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필자의 눈에 더욱 황당했던 것은 이 여자 출연자의 발언에 남자 진행자는 창피한 표정을 짓고 관객은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여자 출연자는 뭐가 촌스럽다는 건지, 남자 진행자는 뭐가 창피하다는 건지, 그리고 관객들은 뭐가 웃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터라 수개월에 한번씩 띄엄띄엄 한국 문화를 접하다 보면 한국인들의 사대주의가 상당한 속도로 심각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해외 바이어들을 만나는 기업체의 수출팀 직원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학원 강사들과 음식점 종업원들까지 ‘마이클’이니 ‘제니퍼’니 하는 어색한 영어이름을 쓴다.
이러한 경향이 가장 강한 곳은 역시나 연예계. 댄스 그룹들이 국적불문의 화려한 서양식 이름을 짓곤 하더니 이제는 솔로 가수들도 버젓이 서양식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한국인 가수가 이상한 영어 이름을 가지고 어색한 뉘앙스의 영어 가사를 억지스런 발음으로 노래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서글픈 생각이 든다. 드라마들도 마찬가지인데 ‘파리의 연인’ ‘프라하의 연인’ 같이 외국어가 섞인 제목의 드라마가 인기가 더 많은 모양이다.
그런데 며칠 전 SBS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제작자들이 기소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드라마의 제작진은 지난해 11월 문화재 청장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실리콘을 이용해 국가사적 124호인 덕수궁 돌담에 종이소품을 붙여 드라마를 촬영했고 이를 떼어낼 때도 끌을 이용해 돌담을 훼손했다.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세련된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오래된 ‘덕수궁’쯤에는 아무 것이나 붙였다 떼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행동했을 이들을 생각해 보면 정말 화가 치민다.
언젠가부터 대한민국 드라마에는 재벌 총수의 아들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중한 외모와 경제력을 가진 이들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희생까지 불사하며 완벽한 ‘백마 탄 왕자님’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리고 대한민국 여성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 왕자님들에 열광하고 있다. ‘파리의 연인’도 그랬고 ‘프라하의 연인’도 마찬가지다. ‘프라하의 연인’에 등장하는 왕자님은 대기업 총수의 아들이자 동시에 현직 검사다. 미남 건 당연하다.
이러한 드라마들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방송 프로듀서’, 즉 소위 ‘PD’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인데 이들은 국내 최고의 엘리트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지상파 방송국의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똑똑해야 하고 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때론 ‘고시’라고까지 비유되는 이 바늘구멍을 통과한 방송국 PD들의 의식수준이 겨우 이 정도인가라는 생각을 하면 정말 힘이 빠진다.
농촌에서는 총각들이 신붓감이 없어서 베트남 처녀들을 만나는 사건이 화제가 되고 있고 도시에서는 여자들이 의사와 변호사 같이 안정된 직업을 가진 남자들만 노골적으로 선호하는 한심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PD들은 ‘훌륭한 남자=부자 2세’라는 등식을 국민들에게 주입식으로 교육하고 있다. PD들은 경제력 상위 0.01% 안에 드는 재벌 2세들의 이야기는 화려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 수 있다는 사실은 영악하게 이용했지만 시청 후에 그들에게 무엇을 남기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 것은 촌스럽고 서양 것이 멋있는 것이라는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는 한국인들. 비록 지금 가진 것은 없으나 결혼만은 부자와 하겠다는 ‘허영심’에 찬 한국인들. 그리고 이 ‘오해’와 ‘허영심’을 이용하여 시청률을 올려보겠다는 방송 프로듀서들. 아편에 취한 국민들에게 머리 좋은 장사꾼들은 계속 아편을 팔고 있다.
김영무 월드 뱅크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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