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카페 / 최유혜 소설집 ‘낯선 땅에서 만난 소나기’
윤락여성·실패한 가장
양로병원의 로맨스 등
우리들의 내면 풍경
10편의 이야기로 풀어내
‘출생의 비밀’은 재벌 이야기와 함께 한국 TV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알고 봤더니, 누가 우리 엄마고, 아빠인데, 엄마나 아빠라고 부를 수 없는 이 가슴아픈 사연-. 반전효과의 극대화를 노리는 이런 류의 소재는 피학적 쾌감이라는 뒤틀린 한국적 정서와도 연결돼 있다.
LA 소설가 최유혜의 중편 ‘낯선 땅에서 만난 소나기’는 이런 출생의 비밀이 배경이다. 평론가 임헌영의 지적대로 그 사연은 신파처럼 구차스러울 수 있다. ‘낯선 땅…’에서는 그러나 이런 신파가 문학작품으로 나아간다. 문학과 신파 사이에 한 깨달음이 있어서 그게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배고픈 거지를 위해 교회에 들어가 기도를 해준다고 배고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자각이 곧 그것이다.
재미가 덜해서 인지 이런 깨달음은 TV 드라마가 잘 넘보지 않는 영역이다. 최유혜 작품 속의 주인공은 그러나 이런 자각을 바탕으로 그녀처럼 출생의 비밀로 고통 겪을 수도 있는 두 아이를 입양한다. 생모에게서 보았던‘기도라는 자기 위안’, 혹은 자기 기만을 뛰어넘는 모성을 치유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최유혜는 이 소설로 2004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이달 초에는 이 작품의 이름을 딴 첫 소설집 ‘낯선 땅에서 만난 소나기’(계간문예 간)를 펴냈다. ‘낯선 땅…’에는 10편의 소설이 실려있다. 발표시기를 보면 최근 2~3년 새 작품이 대부분인 것 같다. 이중 5편은 한국의 문예지에 발표됐지만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은 모두 이민자와 이민사회의 내면을 다룬 것들이다.
한 부부가 청소하러 간 부잣집에서 벌이는 엽기 행각을 다룬 ‘하늘을 흐르는 구름에 임자가 있던가!’(이 소설은 LA에서 연극으로도 공연됐다)와 ‘그 남자 이름도 모르면서’를 뺀 나머지 8편에는 중년 여성이 화자로 나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작가 연배의 여성이 본 이민사회의 내면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콘돔’은 마사지 팔러의 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제목부터 다소 끈적거리는 이 작품은 신문 지면에 그대로 옮기기에는 좀 뭣한 질척한 표현 등을 통해 그 세계의 생리를 리얼하게 그려낸다. 주인공은 이 생활을 청산하리라고 마음먹지만 불시에 영업장을 덮친 단속반원에 의해 철거덕 수갑이 채워진다.
또 다른 단편 ‘남자 이름도 모르면서’는 젊었을 때 두 번이나 사랑을 찾아 떠난 자유부인 경력이 있는 86세 치매 할머니가 중풍 걸린 연하의 노인과 양로병원에서 벌이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로맨스를 담고 있다.
이런 것들은 한국에서는 건지기 힘든 소재들이다. 이민문학이 한국문학의 한 장르라면 이같은 소설로 인해 한국소설은 체험의 폭을 넓히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저소득 무보험 가장의 실패한 인생 마라톤(마라톤), 자궁 속에 빠진 콘돔 때문에 허겁지겁 병원을 찾는 한 윤락여성과 그에 오버랩되는 한인 여의사의 기억(사랑, 사랑, 사랑) 등은 그런 맥락에서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열심히 쓴 작품들이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작가는 물론 미주 한인문학을 아끼는 독자들에게도 즐거운 일이다. 작가는 연주회장에서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에 대해 ‘지독히 외로운 길에 가끔은 이런 갈채의 위로를 받는’(연주회) 것이라고 했다.
한 편의 소설을 발표한다는 것을 음악연주에 비교할 수 있다면 첫 소설집을 낸 기쁨은 골방에 앉아 혼자 소설을 써야 했던 ‘지독히 외로운 길’에 ‘위로의 갈채’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상호 기자> sanghah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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