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문학제 강연 내용을 읽고
8월5일자 <한국일보> 문화마당에 올해 해변문학제에서 한국의 초청 강사들이 행한 강연내용이 게재돼 있었다. 이들 강사 가운데 특히 문학평론가 이명재씨의 강연내용을 읽고 미국에 사는 미주한인 문인들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 내용 가운데 “미주문학은 점차 풍성한 성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해외 문학은 너무 소박하다. 수준이 떨어진다. 중·러에 비해 창작여건이 월등한 미주 문학은 기대에 어긋난다. 글쓰기에 전념하고 고뇌하고 천착하는 자세가 아쉽다. 문인만 많았지 한반도 문단에 기여는 없다. 서울 중심, 의존에서 탈피해 현장을 활용하는 미주문단으로 태어나길 기대한다”고 지적했다.
이명재씨의 말은 뼈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결코 틀린 말이라고 말 할 수가 없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인가. 내가 한국문단으로부터 강사로 초청을 받아 가서 하고 싶은 말을 이명재씨가 먼저 해 주었다. 내가 만일 초청을 받아 한국에 가서 문학강연을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국문학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도 풍성한 성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한국문학은 너무 소박하다. 수준이 떨어진다. 해외동포 문학보다 여건이 월등한 한국문학은 기대에 어긋난다. 글쓰기에 전념하고 고뇌하고 천착하는 자세가 아쉽다. 문인만 많았지 해외문학에 기여는 없다. 미주문인들이 수준 낮은 한국문학 의존하지 않도록 해 달라”
내가 정작 이런 뼈아픈 말을 했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문인협회가 발행하는 시전문 계간지 <한국시학> 2006년 봄에 보면 문학평론가 이운용씨의 계간 시평이 관심을 끈다. 인용해 보면, ‘시의 대중성, 시인의 대중화 문제’라는 시평에서 이렇게 화두를 장식하고 있다.
“<계간 한국시학> 2006 봄호를 읽었다. 110인의 신작 모음이다. 서두부터 우울한 평을 쓰게 되어 송구스럽다. 한마디로 재미없는 시들이 태반이었다. 짜증스런 시를 억지로 읽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 법칙이 망치로 머리를 쳤다. 시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면, 이 경제 용어는 더없이 적합한, 시의 그레셤 법칙일 것이다. 뒤로 넘어갈수록 중견 시인이거나 신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남다른 패기로 새롭게 추구하는 실험성이 있어야 중견 시인과 시인에서 느끼는 참신함이 우리 시를 이끌어갈 믿음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한국시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는 비관론이 앞서지 않을 수 없다. 읽어갈수록 입맛 당기는 매혹이나 호기심보다는 시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다.”
평소 한국시가 수준미달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던 터에 이운용씨의 이 같은 시평은 나의 견해를 확고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이런 비평이 있지만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은 미국이나 한국 시인들 가운데 없는 것은 아니다.
미주문인들 가운데 한국에 의존하는 시인들이 많다보니 수준 미달의 작품을 쓰는 시인들이 많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문학보다는 영미문학을 닮으려는 일단의 문인들도 있다. 이들이 미주문학에 버티고 있는 한 미주문학도 결코 비관할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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