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잔잔하게 때론 휘몰아치며
악기 소리너머 인생이 보이는듯
지난 목요일 저녁 8시, 1200여 석의 라미라다 극장은 벅찬 기대와 숨가쁜 긴장으로 설레고 있었다. 다름 아닌 서혜경과 박트리오의 조인트 리사이틀.
관객석에 불빛이 서서히 사라지며 무대에 조명과 함께 등장한 사람은 박 트리오의 둘째 박선규(LACC교수), 연주한 첫 곡은 쇼팽의 발라드였다. 그의 연주는 침착하고 진중했으며 리듬이나 터치가 아주 정석적이면서도 쇼팽 특유의 서정성과 절제된 낭만적 감흥의 소용돌이를 유감없이 표현해주었다.
두 번째 출연자는 김경선(군산대교수)과 박성연. 그들은 시모와 며느리(박선규의 처), 각기 두 대의 피아노에 따로 앉아 드뷔시가 편곡한 생상의 곡을 연주했다. 그들이 그렇게 문화와 세대 차를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로 극복하고 함께 앉아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 자체로 이미 훌륭한 예술이었다.
다음 무대에 나타난 연주자는 서혜경과 박트리오의 맏형 바이얼리니스트 박윤재(총신대 교수)였다. 박윤재가 연주한 곡은 프랭크의 바이얼린 소나타. 서혜경의 반주는 거침없는 큰 물결이 되었으며 박윤재의 바이얼린은 그 거침없는 큰 물결 위에 유영하는 나뭇잎 새의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잠시 후 박선규와 서혜경 두 사람이 바흐 칸타타를 시작으로 비교적 경쾌하며 빠른 속도와 상당한 기교를 요하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1번과 5번, 스트라빈스키의 러시아 무곡이 이어졌다.
피아노포르테라는 악기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극도의 강약조절과 서로 호흡을 맞춘 쉼표와 이어짐의 표현은 벅찬 감동을 주었다. 특히, 서혜경의 강렬한 피아노 터치를 위한 특유의 정열적인 몸짓은 음악의 생동감을 더 해주었다.
그 다음 등장한 연주자는 첼리스트 박수정(박윤재의 처). 그녀는 슈만의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곡목 70번을 연주했다. 현악기 중에 가장 인간적인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첼로의 음색에 이내 마음은 열려졌고 깊고 평안한 호흡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이어 서혜경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쇼팽의 녹턴과 리스트의 파가니니 주제 5번에 의한 사냥, 역시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6번. 그의 연주를 들으며 단순한 소리 저 너머에 인간이 가진 삶, 그 자체의 부르짖음을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만의 감정일까? 그녀의 화려한 경력,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인생을 피아노에 바친 고독의 산물이다.
피아노에서 수없이 흘린 땀과 눈물의 결정들, 수백 번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심연에서 다시 일어서고 또 일어선 고통의 진주가 아닌가? 이제 그녀의 연주는 어느 듯 인생과 삶이 음에 용해돼 표현된 완숙함이 물신 배어있었다.
곡을 다 끝내고도 청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서혜경은 다시 나와 앵콜곡으로 슈만의 헌정을 연주했다. 이 곡을 다 듣고도 청중들은 일어설 줄 모르고 서혜경은 다시 나와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연주했다. 원래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리스트가 피아노로 편곡한 것이다. 흔히 손이 세 개라도 부족하다는 고도의 난이도를 요구하는 곡이건만 서혜경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피아노를 제압하며 불꽃 튀기듯 이 곡을 연주했다. 때로 피아노를 난타하며 때로 애무하며 엄청난 스피드로 몰아쳐 청중을 사로잡고 마치 시간을 정지시켜 버린 듯 긴 여운을 안겨주었다.
이 숭 <총신대 음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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