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굴쭈굴 피구가 닥터 지바고로 보인다고?
뚱뚱이 호나우도가 사랑스럽다고?”
…
“이 사진과 기사, 나에게 보내는 LOVE LETTER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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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 이야기만 하지 말라던
정 선생님께서 월드컵 때문에 전화까지 하셨으니
답례를 한 겁니다.”
“쭈굴쭈굴 피구가 닥터 지바고로 보인다고? 뚱뚱이 호나우도가 사랑스럽다고?”
귀에 장막을 치자, 귀에 장막을 치자. 연희는 통화의 중단을 또 선언했다.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너와의 통화는 문제가 아니다. 왜 ‘마법의 4중주’인지 ‘황금의 4중주’인지 ‘중원의 지휘자’가 나에게는 더 중요하다. 나의 기사 읽기는 현재뿐 아니라 과거의 인물 추적까지 올라갔다.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 독일의 마테우스, 브라질의 펠레. 그리고 ‘토사구팽’된 인물들. 수비수의 반칙에 걸려 넘어지자 주심이 페널트 킥을 선언했고 그걸 못 넣었다 해서 졸지에 ‘역적’이 되어 이민을 떠났다는 한국인 선수이야기. 브라질의 수문장 하나는 패배의 불명예를 몽땅 뒤집어 쓴 채 살다가 국민들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쓸쓸히 죽었다고도 했다. 경기에 지면 영웅대접을 받던 선수들에게 온갖 비난이 쏟아진 예를 수 없이 나열했다. 뿐이랴, 서로 비난한다. 선수를, 코치를, 심판을, 때로는 주장의 잔디를, 일기를, 운명의 여신까지. 하긴 토고 가나 등은 월드컵 출전이 확정된 날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 했다니, 가히 아프리카에서는 축구가 종교인 동시에 꿈이자 희망임을 알 수가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대하듯이 달래기도하고 구술르기도 하고, 분노와 질투로 후려 차기까지 하면서 끈질기게 그물 안으로 팀가이스트를 몰고 가는 인물들. 하지만 공은 뱅글뱅글, 대굴대굴, 그물 옆으로 뒹굴며 피해만 간다. 반들반들 윤기 흐르는 공 위의 금줄은 방긋방긋 애간장을 녹인다.
대망의 클라이맥스를 향한 숨 고르기 휴식. 그 사이사이로 게임은 계속 되었다. 90분에도 연장전에도 끝내 공이 들어가지 않으면 승부차기로 이어지며 경기는 스위트 식스틴에서 엘리트 에잇으로 그리고 파이널 포로. 대망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앓고 있다. 승자 지단과 패자 피구가 서로의 유니폼을 벗어 나누어 갖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피구의 자주 빛 유니폼을 뒤집어 입고 잔디 위를 걷는 승자 지단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결국 눈물을 흘렸다. 패자 피구도 뒤집어 입었는지 화면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나는 세계의 명화를 보는 것 같았다. 넓은 잔디 위로 그 넓음을 채우고도 남을 두 거인의 걸어가는 뒷 모습, 닥터 지바고를 능가하는 명화의 장면 이었다. 데이빗 린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진행되는 잔디 위의 장면들. 이어서 보여지는 승자 헨리(앙리)와 패자 호날두가 서로 끌어안고 등을 어루만질 때 나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어쩌면 이 날의 눈물은 내 생의 기억 속에 최초로 흘린 눈물의 양과 맞먹을 정도 였다. 예산역의 잔디 위 외삼촌을 태우고 떠난 기차의 여운 속에서 흘린 눈물. 네잎 클로버를 뜯으며 그 위에 떨어 뜨렸던 나의 눈물. 이제 지단과 피구, 헨리와 호날두가 사라진 잔디 위에 내가 있었다. 단발머리 꼬마인 내가 울면서 네 잎 클로버를 손에 들고 있었다. 팀가이스트도 보이지 않는 그 넓은 잔디 위에, 팀가이스트만큼 작은 내가 홀로 울고 있었다. 프랑스와 포르투갈 경기때의 일이었다. 하긴 이 경기에서는 지단과 피구가 맨 앞에서서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입장할 때부터 가슴이 찡해오기 시작했다. 국가를 부르며 지단과 헨리가 화면에 클로즈 업 되고 피구와 호날두가 보일 때도 눈물이 고였었다. 장엄하기까지 했던 장면들. 이어서 전개 될 이들의 대형 발레를 상상하며 설레는 가슴. 데이빗 린이 없어도 연출될 명화의 상연을 기다리며 나는 T.V. 앞에 박제되어 있었다. 팬들은 별 중의 별은 어느 팀의 누구일까를 나름대로 예측들을 하고 있었지만 나의 별들은 이미 결정이 나있었다. 스포츠 각 분야를 묶어 평생을 알고 있던 선수들은 골프의 타이거우드까지, 복싱의 마호메드 알리 까지를 포함해서 손가락이 남는데, 이 짧은 기간 나는 각 나라 별들의 등판번호까지를 알게 되었다. 나에게 일어난 기적이라는 확인에 오직 스스로 놀랄 뿐이었다.
“맞아요. 잘 뽑았어요. 처음으로 월드컵을 관람했다면서 참으로 잘 뽑았어요.”
애당초 64부작 드라마라는 큰 제목으로 기사를 써서 나를 찰나에 사로잡은 기자에게 나의 별들을 말하자 그는 박수를 쳤다. 그리고 다음날 기사에는 나의 별들의 얼굴이 또다시 지방판을 장식했다.
“이 사진과 기사, 나에게 보내는 LOVE LETTER죠?”
나의 질문에 기자는 맞는다고 했다.
“하도 신기해서요.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축구에 열광하고 그게 내 기사 때문에 시작 되었다니 내가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죠.”
기자는 말했다. 자신은 일찍이 축구 광이었노라고. 월드컵과 그에 관련된 선수들의 개인사까지 써놓은 저널이 7, 8권이나 있다고.
“몇일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 이야기만 하지 말라던 정 선생님께서 월드컵 때문에 전화까지 하셨으니 답례를 한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월드컵 열애는 발레를 보듯이, 명화를 보듯이 드라마타이즈 된 것에 불과했었다. 명화를 보면서 배우에게 끌리듯이 나의 별들을 뽑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기자는 내가 뽑은 별들이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았다.
“어쨌거나 LOVE LETTER입니다. 신문지상으로 보내는 공개된 비밀의 은밀한 LOVE LETTER인 셈이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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