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선
“그 날의 송별연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선생님의 시 낭송은 이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는구나 하는 이별의 진한 아픔을 안게 했습니다.”지점장의 송별연에서 내가 낭송한 시는 이형기의 ‘호수’와 ‘낙화’였다.
<호수>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번에도 ‘호수’ 한 편 낭송해 드릴까요. ‘라마르틴’이라는 불란서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의 ‘피안의 호수’라는 시예요. 옛 일을 추억하며, 옛사랑의 소리를 자연에서 듣고자 쓴 시입니다. ‘위고’, ‘뮈세’등과 함께 사랑의 고뇌와 절망 속에 영혼의 소리로 시를 쓴 시인이죠. 좀 길지만 ‘엘리엇’의 ‘황무지’와 더불어 내가 외우고 있는 두 편의 장 시 가운데 하나예요.
“아 -, ‘황무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젊은 날 저의들도 그 시에 빠져 있었습니다. 운명이나 인간의 존재도, 인간 사회도 비판 할 수 있는 기능을 시가 가질 수 잇는 것이구나 하는 눈이 떠졌지요. 우리는 학교의 잔디에 앉아 다투어 그 시를 외우며 청춘의 일부를 받쳤습니다. 그 장 시를 누가 외울 때마다 명동의 ‘OB캐빈’이나 ‘OB뚜울’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축하연을 벌렸습니다.”
지점장은 학창시절의 청춘이 되어 활기가 넘쳤다.
“얼마나 열심히들 외웠던지 ‘태종 태세 문단세…’ 이조의 역대왕 이후 지금까지 낭송 할 수 있는 시입니다. 물론 1장 ‘죽은 자의 매장’뿐입니다 만은….”
‘엘리엇’이 우리의 테이블에 함께 있었다.
“5장을 다 외우는 사람은 없겠죠. 1장의 앞 부분 때문에 다 빠져 버렸을 테니까요.”
“맞아요.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해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은 자라고’, ‘추억과 정욕이 뒤엉키고’, ‘잠든 뿌리는 봄비로 깨어난다’, ‘겨울은 차라리 따스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 ‘매마름 구근으로 작은 생명을 키웠으니’…. 완전히 사로 잡았죠. ‘4월은 잔인한 달’은 전 세계가 시도 때도 없이 써먹지 않습니까.”
“시인이 되셔야 할 걸 그랬나 봐요.”
“왜 아니겠습니까? 우리 세대에 시인이나 소설가의 꿈을 꾸지 않은 젊은이는 드물었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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