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도 객석도 열정과 고통의 순례
대서사극이 끝났다. 고통의 순례도 끝났다. 열정을 사른 후 온몸의 힘이 빠지듯 공연이 끝나니 땅이 꺼질 한숨이 나온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작 4부작으로 16시간(휴식시간 제외) 의 대작. 세계적 명성의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마린스키 극장이 지난 10월6일부터 11일까지 오렌지카운티 퍼포밍아츠센터 시거스트롬홀에서 ‘니벨룽의 반지’ 사이클을 완주했다.
니벨룽의 반지 ‘발퀴레’의 한 장면.
‘니벨룽의 반지’ 사이클은 첫날 전야극격인 ‘라인의 황금’을 시작으로 넷째날까지 ‘발퀴레’‘지그프리트’‘신들의 황혼’순으로 이어진다. 절대권력인 반지를 쟁취하려는 난쟁이족과 거인족, 신, 그리고 영웅적 인간 사이에 얽힌 탐욕, 속임수, 사랑, 배신, 그리고 좌절의 드라마다.
1876년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초연된 이래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는 오페라의 에베레스트봉이다. ‘특출한’ 등산가가 아니면 오를 수 없듯이 ‘특출한’ 오페라단이 아니면 올릴 수 없다. 그런 ‘링’사이클이 남가주에서 최초로 올려진 것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초연이 1900년 이전이었고, 한국에서는 작년 마린스키 극장 공연으로 ‘링’이 올려졌으며, 태국의 방콕 오페라조차 앞으로 4년간 동남아시아 최초의 야심찬 공연을 기획하고 있는 마당에 LA오페라가 2008-2009년 시즌이 되어서야 자체 작품을 올린다는 것은 만시지탄이다.
어쨌든 기대와 화제가 컸던 만큼 여운도 크다. 게르기예프의 마린스키 극장 프로덕션은 그들이 ‘특출한’ 반열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성악가들은 놀라웠고, 오케스트라는 탄탄했다. 첫날부터 마지막까지 시거스트롬홀을 압도적 사운드로 채웠다. 그것은 훌륭한‘러시안 링’이었다.
플라시도 도밍고는 ‘발퀴레’에서 지그문트역을 맡아 여전히 젊고 호소력 진한 음색을 들려주었다. 지그린데역의 믈라다 후도레이는 섹시한 자태와 부드러우면서도 깊이있는 목소리를 뽐냈는데, 도밍고와의 사랑의 하모니에서는 초절정의 관능미를 선사했다. 여자 주인공격인 브륀힐데역은 사흘간 이어진 출연 모두 올가 세르게예바였다. 그녀는 체구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음색을 가졌고 강인하고 위엄있는 브륀힐데였다. 마지막날로 갈수록 노래가 좋았는데, 특히 ‘신들의 황혼’ 라스트를 장엄하게 장식했다.
그러나 연출에 있어서는 불만이 많았다. 게르기에프와 조지 티시핀의 공동 제작의 상징물들은 일관성이 의심스러웠고, 파격적 의상, 어색한 연기도 실망스러웠다.
사족. 청중들은 어땠나. 대개 바그너의 악극을 찾는 이들은 다른 점이 있다. 특히 ‘링 사이클’같은 작품을 대하기 전에는 관련 책 1-2권을 읽는 것은 기본. CD나 DVD를 대본과 함께 전곡을 꼼꼼히 예습한다. 더구나 ‘링 사이클’을 따라 세계를 순례하는 광들도 많다. 당연히 객석엔 빈자리를 찾기 힘들다. 그러나 강행군의 공연에 체력도 한계가 있는 법. 앞과 뒤, 옆 자리엔 자세를 고쳐앉느라, 밀려오는 졸음을 참느라 고행의 기미가 역력하다. 아리아의 꼬리에 ‘중간 박수’를 칠 수 있는 이탈리안 오페라와 달리 이 바그너 악극엔 선율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니 박수치며 정신을 추스릴 틈도 없다. 여느 오페라엔 2시간 반이라는 시간이라면 인터미션이 두차례는 있을 법한 것인데, 휴식도 없이 몰아쳐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나와보면, 이제 3막중 겨우 첫번째 막이 끝난 것일 뿐이다!… 이 긴 장정을 마치고 나온 청중들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서진 /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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