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역사의 포옹이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보잉 점보기는 충직한 종처럼 우리를 안고 밤하늘을 날고 있다. 고도 3만6천 피트. 육중한 몸체를 한 방향으로 고정시킨 채 고른 숨을 내쉬며 대서양을 건넌다. 시속 6백마일.
달을 보려고 기창 덮개를 올린다. 아, 그 때, 눈앞에 펼쳐지는 북두칠성! 그 친숙하고 아름다운 성좌가 손끝에 닿을 것만 같다. 올려다보는 별이 아닌 내 눈 높이에서 만난 북두칠성이 이렇게 크고 영롱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행은 깊고 푸른 별나라에로의 초대인 것을...
선잠을 깨니 비행기는 부다페스트에 내린다. 다뉴브강의 진주라는 도시. 그러나 하늘은 낮게 구름 장막이 드리웠고 도시도 회색 빛이다. 푸른 다뉴브는 어디에 있을까? 부다페스트는 역사의 도시 부다와 상업 중심지인 페스트가 합쳐진 도시라고 한다. 부다는 물을 뜻하고, 페스트는 불을 의미한다고 했다. 나는 금새 부다페스트가 모순(矛盾)의 도시임을 알아차린다.
동양의 뿌리를 가진 서양의 도시. 정복자로 와서 수 백년간 피정복자의 고통과 수모로 얼룩진 역사. 13명의 노벨 수상자를 배출한 우수한 민족이면서도 낙후된 나라경제. 밝고 경쾌한 헝가리 민속음악의 전통을 자랑하면서도 우울한 민족성과 높은 자살률.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란 노랠 들어 보셨나요? 1930년대 나치침공이 임박했던 부다페스트. 두 남자와 한 여인의 슬픈 사랑이야기의 주제곡이지요. ‘우울한 일요일. 내가 흘려보낸 그림자들과 함께 내 마음은 모든 것을 끝내려하네. 나는 기쁘게 흘러간다네, 내 영혼의 마지막 호흡으로 당신을 축복하리’이 곡이 나간 뒤 6주만에 180여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끊었답니다. 작곡자 레조 세레스도 결국 다뉴브에 투신했고요.
인솔자 M님은 이 멜로드라마를 들려주며 헝가리인들의 깊은 패배의식의 원인을 지난 역사에서 찾았다. 헝가리는 건국이후, 몽고의 침입과 150년에 걸친 터키의 지배로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정아래 가혹한 통치를 당했다. 1차 대전의 결과도 참담했다. 패전한 헝가리는 국토와 인구의 60%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2차 대전 때도 독일 편에 섰다가 다시 한번 패전의 고통을 맛보게 된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전쟁만 하면 패한다는 자조적 패배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게다가 40년간의 소련 공산 정권은 전 국민을 수동적이고 무책임한 타성에 젖게 한 것이다.
그러나 유적지를 돌아보면 헝가리인들의 높은 기상과 자유를 향한 뜨거운 염원을 볼 수 있다. 1956년 소련군들에 맞서 수 천명이 희생되면서도 치열한 자유화 운동을 벌였던 민족이 아닌가! 국부이자 수호자인 스테판 왕, 15세기 헝가리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마차시 왕, 터키군을 몰아낸 후냐디 장군, 그리고 18세기에 모국어를 되찾고 부흥을 선도한 체체니 백작 등, 곳곳에 국민영웅들의 동상이 세워져 추앙 받고 있었다.
화창한 오후엔 항전하는 어부들이 지었다는 어부의 요새에 올랐다. 긴 회랑과 고깔모양의 지붕이 동화 속 같다. 성벽 곁의 카페의자에 앉아 멀리 다뉴브강과 네오 고딕식 의사당건물이 바라본다. 강이 평화롭다. 푸른 다뉴브가 아닌 것이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헝가리인들이 오랜 세월 흘렸던 눈물과 피가 모여 흐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회랑 끝에서 헝가리언 라프소디가 흘러나온다. 헝가리의 혼을 가장 잘 나타냈다는 리스트의 광시곡이다. 그가 조국을 위해 쓴 이 곡은 헝가리 민요, 챠르다슈 무곡을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자유분방하고 정열적인 리듬의 프리스카 부분과 침울하고 슬픈 라싼 조가 서로 교차한다. 광시곡의 이 대비도 헝가리의 운명적인 모순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다뉴브에서 모순의 역사를 애정을 갖고 포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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