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김경년(UC 버클리 교수)
신문이나 잡지에서 한국에 관한 기사나 글을 보시면 오려서 보내 주시는 나의 시어머님. 이십여 년 동안 시모님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신문기사들이 몇 상자가 된다. 보내주신 기사들 중에는 더러는 나의 관심사 외의 것들도 있어서 보고는 그냥 버리거나 또는 재생품 통에 던져 버리기도 하는데, 얼마 전 받은 편지 속에는 참으로 오래 된 유인물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노령이신 시모께서 자기의 서류들을 정리하시다가 보게 되셨다며 내게 보내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1951년 7월 28일자로 된 초청 공고문이었는데 다름아닌 “한국 전쟁의 휴전 협정을 미 대통령에게 촉구하려는 시민 모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참석을 바란다는 초청 공고문이었다.
나의 시모님은 U.C. Berkeley와 Stanford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하셨으며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고 여성문제와 세계평화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시민 운동에 참여하신 인테리이신데 그 공고문도 아마 한국전쟁 중 정전 협정을 촉구하는 모임이었고 그 모임에 참석을 하셨던 모양이다.
1951년 7월 28일. 47년 전, 그 때 나는 열 살이었고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며 토성국민학교 5학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휴전 협정을 결사 반대한다는 시위를 하던 것은 그보다도 2년이나 후인 1953년, 여학교를 갓 들어가 어색한 교복을 입고, 쨍쨍 내려 쬐는 무더운 태양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지치도록 몇 시간씩 길가에 서 있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아, 참으로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5,000여 마일의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미국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는 치열하고 비참한 한국의 전쟁을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미국 정부에 휴전을 협정하라고 촉구하던 금발, 벽안의 한 중년 부인, 그리고 그 바다 건너편, “휴전협정 결사반대”를 의미도 모르며 따라 외치던 조그만 여중생.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 두 사람이 한가족이 되어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고부간이 되리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산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의 연속이다. 오늘 하루의 나의 말과 행동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의 삶과 어떻게 엇갈리게 될지 전혀 모를 일이다. 인연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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