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의 특성 듬뿍 보여준 ‘잘 짜여진 연주회’
흔히들 LA를 문화의 불모지라고 말한다. 아마도 클래식 문화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고전음악 분야를 제외한, 영화나 무대연극, 그리고 각종 연예 분야는 LA가 세계를 주도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고전음악만을 놓고 볼 때 LA는 20세기 현대음악만큼은 세계 속에 우뚝 솟아있음을 전문가들 외에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뉴욕은 유럽 서구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세계의 중심이 되고 있지만 LA는 역사와 전통 없이 다문화 도시답게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형성해 나가고 있다.
여기서 잠깐 뉴욕과 LA의 문화의 구심점, 즉 총체적 중심 공연장을 비교해 보자. 뉴욕에는 링컨센터가 있고 LA에는 뮤직센터가 있다. 링컨센터는 3개의 공연장, 즉 뉴욕 스테이트 하우스(뉴욕시티 오페라, ABT),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에버리 피셔홀(뉴욕 필하모닉)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LA뮤직센터는 월트디즈니홀(LA필하모닉, LA매스터코랄)을 위시해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LA오페라), 아맨슨 디어터(뮤지컬 공연장), 그리고 마크 테이퍼 포럼(연극 공연장)의 4개 컴플렉스로 구성되어 있으니, 공연장만 비교해 봐도 LA가 더 진보적임을 알 수 있다.
지난 9일 LA필이 주관하는 현대음악 시리즈 ‘초록우산’ 음악회가 있었다. 20년 전 LA필의 상임작곡가였던 스티븐 스터키가 창설해 오늘날까지 세계 초연, 혹은 미국 초연 작품들을 통하여 현대음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는 이 초록우산 음악회야말로 남가주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음악회라고 생각된다.
이번 연주회에선 20세기의 거장 스트라빈스키와 쉔베르그의 뒤를 있는 금세기 최고의 작곡가 루토슬라브스키의 작품인 ‘체인 I’(Chain I)을 시작으로 도나토니의 6중주곡 ‘핫’(Hot), 스터키의 현악사중주곡 ‘넬롬바, 넬라 루체’(Nell’omba, nella luce), 그리고 살로넨의 3악장으로 된 ‘캐치앤 릴리스’(Catch and Release, 미국 초연)가 선보였다. 모두 실내악곡으로 짜임새나, 음색의 변화, 악곡구성, 이런 요소들이 현대음악의 특성인, 극히 지적이고 이성적인 음악의 ‘에센스’를 강조해온 ‘제2의 비엔나 학파’의 영향을 듬뿍 받았다는 느낌을 주는 잘 짜여진 음악회였다.
루토슬라브스키는 1958년 벨라 바르토크를 추모하여 쓴 ‘장송곡’을 발표함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작곡가. 엄격히 규제된 틀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구가하는 그는 1983년 초연된 ‘체인I’에서도 자유분방한 리듬과 불규칙적이고 즉흥적인 연주기법을 한 폭의 삽화처럼 사용함으로써 독특한 작품을 창조했다. 도나토니의 83년 작품인 실내악곡 ‘핫’은 프랑스 색서폰 협회의 위촉작품으로 다니엘 키엔츠키에 의해 1989년에 초연됐는데 작곡가 자신이 말했듯이 ‘추상적 재즈음악’ 그 자체였다.
살로넨의 ‘캐치 앤 릴리스’는 광범위한 음악적 스타일을 요하는 곡으로 현재 세계 최고의 색서폰 주자의 한 사람인 더글라스 마섹이 연주해 곡의 가치를 한층 드높였다.
클래식 음악회에 가보면 대부분의 청중은 장년 내지 노년층들임을 보면서 클래식 음악의 장래가 걱정되곤 했는데, 웬만한 음악애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현대음악 연주회의 청중이 청장년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게 너무나도 고무적이고 희망적이었다.
진 정 우
/음악박사
작곡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