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영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나라다. 미 ‘건국의 아버지’들은 영국을 배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국인으로서 타고난 권리’를 보다 잘 지키기 위해 나라를 세웠다. 미국이 영국의 승계자임을 보여주는 것들은 수없이 많다. 매 연초 대통령이 의회에서 하는 국정 연설도 그 중의 하나다.
영국에서는 매년 국왕이 의회에서 국정에 관한 연설을 한다. 원래 ‘왕좌에서의 연설’로 불렸지만 지난 수십 년간 엘리자베스 여왕이 해왔기 때문에 지금은 ‘여왕의 연설’로 불린다. 영국은 불문법 국가라 이것이 관습이지만 미국은 헌법에 “대통령은 때때로 의회에 합중국의 현 상황에 대한 정보를 주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법안 심의를 건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첫 국정 연설을 한 사람은 조지 워싱턴이다. 1790년 1월8일 당시 수도였던 뉴욕 의사당에서다. 그러나 모든 대통령이 의회에 나가 연설한 것은 아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이것이 너무 영국 왕실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문서로 보내 서기가 읽게 했다. 그 후 이 방식은 1913년까지 계속돼 오다 우드로 윌슨에 의해 깨졌다. 문서로 한 마지막 국정 연설은 1981년 카터가 했다. 연설 시기도 1934년 전에는 연말에 하던 것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1월로 바꿨고 이제는 거의 1월 마지막 화요일에 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국정 연설을 할 때는 상하 양원의원은 물론 대법원 판사와 각료, 합참 회의 멤버들이 참석한다. 대통령이 연설하기 전 주로 하원의장이 “여러분께 미국의 대통령을 소개하게 돼 영광입니다”라고 말하면 모두가 일어나 박수로 환영한다. 이 때 대통령의 이름은 말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지금 연단에 선 사람은 특정인이 아니라 미국을 상징하는 대통령이며 참석자들이 보내는 경의도 개인이 아니라 대통령직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3일 집권 이후 가장 우울한 국정 연설을 했다. 지지도는 최악이고 이라크 사태는 꼬일 대로 꼬였다. 그러나 그런 대통령에 대해서도 미국 정치인들은 기립박수로 깍듯한 예우를 지켰다. 부시는 부시대로 “여성 하원의장과 함께 국정 연설을 하는 첫 번째 대통령이라는 영광을 갖게 됐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연방 상원과 하원의원 각 한 명이 (병으로)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조속한 쾌유를 빕니다”라며 연설을 시작했다. 어딘지 여유가 느껴진다.
거의 비슷한 시각 서울 청와대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 연설을 했다. 자신은 민생 파탄을 만든 책임이 없으며 언론과 야당의 저주 속에서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한다. 이런 발언을 여야 의원이 모여 있는 국회에서 했다면 기립박수 대신 야유를 받지 않았을까.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대통령 연설 때문에 ‘주몽’을 제 시간에 보지 못했다며 항의가 빗발쳤다 한다. 아무리 인기 없는 대통령이지만 연속 사극 한편이 나라의 앞날에 관한 연설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연초부터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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