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범죄의 피해자인 소설 ‘요코이야기’의 주인공인 요코와 김군자(81)할머니. 전쟁이 남긴 야수의 발톱에 할퀸 요코는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인 반면, 김군자 할머니는 1943년 일본군의 만행을 생생히 기억하는 생존 인물이다. 그러나 요코와 김군자 할머니를 대하는 한인들의 태도는 소설과 현실의 간극만큼이나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지난 5일 연방의회 증언과 서부지역 대학 순회 증언회를 위해 미국 땅을 밟은 김 할머니는 “또 창피해서 어쩌나...”라며 얼굴을 붉힌 채 일제의 만행을 40~50살 어린 기자들에게 털어 놓았다.
김 할머니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주변의 냉소와 비웃음이다. 일제의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약 15년.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인들은 일본의 만행에 경악을 한 반면 일본 정부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 범죄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 또한 세월의 흐름이 허망할 정도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주지 못 한 채 팔짱만 끼고 있다.
지난 달 31일 연방하원에 일본계 마이크 혼다 의원이 발의한 일본 정부의 위안부 만행에 대한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새삼스레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결의안은 소설 ‘요코이야기’로 불붙기 시작한 한인들의 반일감정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양상이다. 한인들은 “이번 기회에 꼭 결의안을 통과시켜서 일본의 만행을 알려야 한다”고 분을 삭이지 못 하고 있다.
특히 한인들의 화를 복 돋우는 것은 일본 정부의 태도이다. 일본내 여론은 일본계 연방하원이 이 같은 결의안을 내놓은 데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함 심정을 토로하는가 하면 미 연방의회의 거물 정치인 출신을 로비스트로 고용하고 일본 자민당 의원들이 일미 친선을 구실로 대거 방미, 조직적으로 결의안 채택을 저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과거의 진실을 호도하려는 일본 정부는 매서운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데 이견을 가진 이는 없다. 소설 ‘요코이야기’가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도 원폭 피해국을 이유로 태평양 전쟁의 가해자란 타이틀을 피해자로 슬그머니 갈아치우려는 일본의 의도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인, 그리고 한국민들 모두가 함께 경계해야 할 것은 일본만이 아닌, 우리의 내부의 무비판성이다. 김 할머니를 미국에 초청한 캘리포니아예술대학의 석혜인씨는 소설 요코이야기 논란에 대해 “일본의 범죄를 비난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범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며 “일제 패망직후 한반도에서 일본 여성을 대상으로 성폭행이 있었다면 그것은 일제 위안부와별개로 진지하게 다뤄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민주화를 거치며 무수한 위원회를 출범시켜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저질렀던 한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은 과거의 진실 찾기를 위해 나선 한국 사회의 성숙함을 보여 준 큰 성과다. 야만적인 전쟁이 훑고 간 뒤에는 언제나 인간의 추악함이 배설되어 있음은 역사가 입증해 주고 있다. 1945년 ‘현실 속의 요코’를 파헤치는 것은 부끄러운 역사일지언정 일본과 차별화된 한국 사회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다.
이석호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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