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형편이 말이 아니다.
잔여 임기를 20여 개월이나 앞둔 시점에서 벌써 ‘실패한 대통령’ ‘역대 최악의 지도자’ 등 단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더 이상 볼 게 없다는 뜻이다. 한때 90%를 웃돌던 지지율이 30%선으로 주저앉고 말았으니 화려한 비상을 멀미나는 추락으로 마감한 셈이다. 부시의 지도력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는 결론이다.
그의 인기가 곤두박질 친 원인은 역시 이라크 사태에서 찾아야 한다. 이라크야 말로 부시가 자신의 ‘정치 자산’을 송두리째 털어 넣은 승부처기 때문이다.
바그다드 함락 4주년을 갓 넘긴 현재 이라크는 인명과 자원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로 변했다. 미군 사망자수가 3,300명에 육박하고 있고 부상자도 2만4,600여명을 헤아린다. 전비로 나가는 돈만 주당 평균 20억 달러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투자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얻은 소득은 별로 없다. 이라크는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와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 특권을 누렸던 수니파 사이의 격렬한 종파분쟁으로 내전위기를 맞고 있고, 미국은 양측 모두로부터 공격과 배척을 당하고 있다.
부시의 위기는 미국민 사이에 ‘우리가 이라크에 들어간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면서 본격화됐다.
이라크와 관련한 부시의 가장 큰 실책은 침공 단계에서 ‘국민적 합의’를 구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아닌 말로 국민을 ‘공범’으로 끌어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에누리 없이 몽땅 뒤집어 써야 하는 입장이다.
지도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서는 안 되며 아무리 힘겹더라도 구성원들의 합의와 이해를 구하는 절차를 반드시 밟아야 한다는 평범한 원칙을 무시한 탓에 그가 져야 할 책임의 부피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투명하고 적법한 합의절차를 무시한 지도자의 결정은 끔찍한 부메랑으로 변하고 만다는 사실을 망각한데 따른 대가이다.
부시의 두 번째 실수는 이라크 사태가 통제 불능으로 치닫고, 정책수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을 때 사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기민하게 대응하지 않은 점이다.
일반인들이 놓치는 주요 사안의 ‘숨은 그림’까지 찾아내야 할 리더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라크의 험한 상황에 눈감은 채 잠꼬대처럼 ‘노선유지’를 고집한 것은 결국 국민을 기만하고 오도하는 행위였다. 자신의 판단과 정책 오류를 솔직히 시인하고, 막힌 곳을 뚫고 굽은 곳을 펴려는 용기와 유연성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그의 신뢰성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부시의 추락에 기여한 세 번째 실수로는 궁극의 목적을 위해 절차는 얼마든 무시해도 좋다는 편법주의로 미국의 법적, 도덕적 가치를 크게 훼손한 점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장 없는 비밀 도청과 감청, 테러용의자들의 자백을 끌어내기 위한 고문의 아웃소싱 등이 대표적인 본보기다. 그는 안보라는 ‘자의적 절대가치’를 설정한 후 그 아래 미국의 건국이념은 물론 법과 도덕적 정의까지 종속시킴으로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가치의 전도현상을 불러왔다.
그리스 신화에는 밀랍과 새털을 이용해 만든 날개로 하늘을 날게 된 이카로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카로스는 하늘을 나는 쾌감에 취해 ‘태양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밀랍이 녹는 바람에 에게 해로 추락해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밀랍날개가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누구나 국민이 만들어준 보이지 않는 ‘이카로스의 날개’를 등에 달고 있다. 바로 이것이 민심을 거스르고 국민의 경고를 무시한 지도자가 추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부시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날 수가 없다.
이강규 국제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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