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국운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일까. 위대한 정치가, 장군, 학자, 예술가 등등이 큰 몫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때로는 이름 없는 인물들도 이에 못지않은 기여를 한다. 그 중한 명이 바다에서 정확히 경도(longitude) 재는 방법을 고안해낸 존 해리슨이다. 경도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본다.
영국 해군은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친 이후 제2차 대전 때까지 400년 가까이 세계의 바다를 지배해왔다.‘해가 지지 않는 나라’,‘영국은 파도를 지배한다’(Britannia rules the waves)는 말이 모두 영국의 제해권 장악에서 나왔음은 물론이다.
유럽 변방의 작은 섬에 불과했던 영국은 어떻게 해상 강국이 되었을까. 영국인들은 그 원인을 영국 해군의 탁월한 전략과 용기에서 찾고 싶어한다. 그러나 정답은 이보다 평범하다.
영국 해군이 갖고 있던 기술이 경쟁국에 비해 탁월했기 때문이다. 선박과 함포의 성능이 뛰어난 탓도 있지만 이보다 결정적인 것은 영국이 어떤 유럽 국가보다 먼저 바다 한 가운데서 경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해의 위치만 정확히 재면 어디서나 쉽게 알 수 있는 위도와는 달리 경도는 달의 궤도와 주변 항성의 존재 등을 모두 고려해 복잡한 계산을 해야 답이 나왔다. 그러나 19세기 중반까지 이를 정확히 잴 수 있는 기술이 유럽인들에게는 없었다.
그 결과 배가 경도 상 어느 지점에 있는가는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한 난파 사고가 속출했다. 1707년 10월 22일 프랑스의 지중해 함대를 무찌르고 지브롤터에서 돌아오던 쇼블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경도를 잘못 파악하는 바람에 영국 근해에서 좌초했고 2,000명의 해군이 수장됐다. 쇼블 제독은 가까스로 해변까지 올랐으나 그의 반지를 탐낸 지역 주민에게 살해됐다.
이런 사고가 잇따르자 영국 의회는 마침내 1714년 7월 8일 ‘경도 법’(Longitude Act)을 통과시키고 바다 위에서 경도를 0.5도 오차 한도에서 정확히 맞출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사람에게 2만 파운드(지금 돈으로 수백만 달러)를 상금으로 준다는 공고를 내걸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매달린 사람은 영국인들만이 아니었다. 갈릴레오, 호이겐스 같은 당대의 석학이 달려들었고 태양왕 루이 14세도 이를 풀기 위해 왕립 학술원을 만들고 파리에 천문대를 세웠다. 영국이 뒤늦게 그린위치 공원에 왕립 천문대를 세운 것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별과 달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이 경도 파악의 지름길이라는 것이 당시의 대체적인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뉴턴 또한 이에 매달렸다.
석학뿐만이 아니다. 별의별 사람이 희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다 나왔다. 그 중 하나는 ‘상처 입은 개’ 해법이다. 프랑스에서 원거리에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마술 약이 개발됐다. 상처를 싸맸던 밴디지에만 뿌려도 상처가 낫는다는 것이다. 상처 입은 개를 배에 태운 후 정오에 상처를 싸맸던 밴디지에 이 약을 뿌리면 개가 반응할 것이고 그 시각을 기준으로 경도를 알아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정작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이런 황당무계한 사람들도 기라성 같은 석학도 아니고 존 해리슨이라는 이름 없는 목수였다. 1693년 요크셔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독학으로 수학과 공학을 공부했으며 시계를 만드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가 만든 목재 시계는 나무결을 이용해 기름 없이도 부품이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반영구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돼 있다.
바다의 파도, 온도와 습도의 변화에 영향 받지 않고 정확히 가는 시계를 만들 수 있다면 현지 시각과 본국의 시각과의 차이를 이용해 경도를 알아낼 수 있다는 데 착안한 그는 수십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1737년 자기 이름을 딴 시계 H-1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이 시계는 ‘경도 법’ 규정한 오차범위 내에서 경도를 알아내는 것을 가능케 했지만 이에 성이 차지 않은 그는 심사위원들을 설득시켜 더 시간을 줄 것을 요청, 4년 뒤 H-2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는 이에도 만족치 않고 18년에 걸쳐 H-3를, 그리고 1년 뒤인 1760년 시계 제조술의 결정판 H-4 제작에 성공한다.
그는 ‘경도 법’에 규정에 따라 상금을 요구했지만 주로 천문학자와 수학자들로 만들어진 심사위원회는 날이 흐리면 보이지도 않는 달과 별의 위치 파악을 통한 경도 알아내기를 고집하며 좀처럼 그에게 상금을 주려 하지 않았다. 지치고 성난 해리슨은 마침내 국왕 조지 3세에게 직접 청원하기에 이르며 영국 왕은 그의 공로를 인정, 약속한 상을 내린다.
그 후 해리슨이 만든 시계는 모든 영국 배에 실려 세계 어디서나 정확히 경도를 알려줌으로써 영국 함대가 지구 곳곳을 안방처럼 드나드는 것을 가능케 했다. 세계 표준시가 그린위치 천문대를 지나는 경도를 기준으로 맞춰진 것도 해리슨의 공이다. 경도 경쟁에서 뒤진 프랑스는 1911년까지 파리 기준 시간을 고집했으나 결국은 그린위치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그린위치 기준시라는 말을 쓰지 않고 “파리 기준시보다 9분 21초 늦은 시각”이라는 표현을 썼다.
존 해리슨과 경도 이야기는 때로는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위대한 장군이 아니라 평범한 장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린위치 천문대>
<국가 운명, 때로는 장인이 결정>
경도에 얽힌 이야기를 일반인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파헤쳐 소개한 대표적인 인물은 데이바 소벨이다. 뉴욕 타임스 과학 전문 기자로 수상 경력이 있는 그녀는 디스커버, 라이프, 뉴요커, 오듀본 등 여러 잡지에 글을 쓰고 있다.
그녀의 대표작 ‘경도’(Longitude)는 29개어로 번역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경도 문제를 풀기 위해 고심한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지금은 컴퓨터와 인공위성으로 손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경도는 해리슨 이전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풀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난제였다. 한 기능공의 집념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는가가 차분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묘사돼 있다.
역시 그녀가 쓴 ‘갈릴레오의 딸’(Galileo’s Daughter)도 갈릴레오와 딸과의 관계를 통해 거인의 일생을 조명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