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齒) 시린 동치미 국물의 미학-김채원의 <겨울의 幻>
1. 물극필반 (物極必返)
물극필반(物極必返)이라는 말이 있다. 사물이 어떤 상황의 극에 달하면 반드시 제 자리로 돌아 온다는 이치, 결국 극과 극이 맞닿아 있어 서로 통한다는 뜻이다.
우리 삶의 수많은 극과 극들, 이를테면 행과 불행, 사랑과 증오, 화평과 불화,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생(生)과 사(死)의 길이 맞닿아 서로 통한다는 말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여로가 시작되고, 사랑이 지나치면 증오로 화하며, 만날 때에 헤어짐을 준비한다는 한용운 시인의 말처럼, 인간사의 모든 일이 새옹의 지마처럼 길흉화복 인과응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하나의 둥근 환(環)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리 삶이 갈아앉은 배처럼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순간, 꼬꾸라질 듯 빠르게 흘러가는 강물로 변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 아닌가.
“대기 속에는 잔혹하고 무서운 새들이 가득 깃들어 있다” 는 알베르 까뮈의 말처럼, 삶 속에 죽음, 안정 속에 불안정, 침묵 속에 소음, 그리고 사랑 속에 증오라는 이름표를 단 무서운 새들의 어두운 깃듦을 알기에, 우리는 가끔씩 <이방인>의 뫼르소우처럼 생의 이방인이 되어 뚝,하고 시침을 떼보기도 한다.
김채원의 <겨울의 幻>을 통해 우리는, 물극필반의 단순한 이치가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굳센 법칙임을 깨닫게 된다.
<겨울의 幻>은1989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다. 사실, <겨울의 幻>은 이상문학상이라는 ‘상’의 특징에 썩 잘 어울리는 소설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상문학상이 말그대로, 이상이라는 한 천재 작가의 아방가르드와 실험정신에 대한 계승과 초극의 정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겨울의 幻>은 거기에서 한참 먼 곳에 있기 때문이다.
<겨울의 幻>은 실험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통적인 수법으로 나이든 여자의 떨림, 물극필반하는 생, 이 지지부진한 일상 앞에서의 어지러움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더욱 <겨울의 幻> 속으로 더욱 깊이 침잠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2. 때묻고 구겨진 버선 같은 인생과 맞서는 방법
6년 간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소멸해 가는 어머니를 담당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나’는 ‘당신’을 만나, 비로소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하고 어떤 떨림에 대해 알게 된다. ‘당신’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된 ‘밥상을 차리는 일’과 ‘싸리문 여잡고 기다리는 일’의 깊고도 숙연한 의미와 조우하는 일은 ‘나’의 삶 전체가 남성성의 부재로 채워진 것이라는 자각에 가 닿게 한다.
얼굴조차 모르는 할아버지, ‘밥상을 뒤엎는 여자’였던 어머니를 떠나 새 여자에게 가버린 아버지, 어느날 삼팔선 저 쪽으로 사라져 버린 삼촌, ‘언제나 눈을 새초롬하게 내려깔고’ 있던 ‘나’의 남편까지. 그들 남자들이란 ‘나’의 인생에서 하나의 커다란 블랭크, 혹은 부재하는 이름들이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와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유전되어 오는 더럽고 질긴 운명이자 팔자임을 ‘나’는 잘 안다.
저는 검은 치마저고리에 상복을 입고 구두정리를 하던 그대로
허리를 굽힌 채 잠시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마, 눈이, 라고
뜻도 없이 중얼거리거고 주저앉을 때, 고무신이 벗겨져 나간 제
버선발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며칠 동안 갈아신지 못한 버선은
부엌바닥에서 찐득한 때가 까맣게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이상한
불행감이 저를 휩쌌습니다. 제 인생이 이 버선바닥처럼 더럽게
구겨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겨울의 幻> 중에서-
검은 치마 저고리를 입고 망자를 위한 의식에 참여하고 있던 눈 내리던 밤, ‘나’의 삶이 더러운 버선바닥처럼 볼품 없는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순간에야 비로소 ‘나’는 뿌리를 잘 못 내린 나무같은 일상을 걷어 치울 용기를 얻게 된다.
그러나, 오랜 이혼녀 생활 중에 만난 ‘당신’은 또 하나의 부재를 가져다 줄 것임을 ‘나’는 잘 안다. ‘나’의 삶은 언제나 부재로 가득찬 작은 항아리같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작은 항아리 속, 정월의 동치미처럼 온통 얼어붙은 한 덩어리의 무우 조각 같은 고독과 슬픔에 몸을 떨며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났으니까.
3. 정월의 동치미 국물처럼 차갑고 시린 삶이여
잘 못 심어진 나무들이 ‘나’의 머리에 뿌리라도 내리는 듯 두통을 앓던 초저녁, 질긴 편두통과 재미없는 세상을 감추어 줄 검은 밤이 아직도 멀 때, 두부 한 모와 자반 고등어 한 마리를 사러 동네 슈퍼로 밤마실을 나가던 날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당신’또한 구회 말의 홈런 한 방처럼 내 생의 구멍, 오랜 결핍을 만회해 줄 수 없음을 ‘나’에게 자각시켜 주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을 놓아 버리기로 결심한 채, 스위스 치즈처럼 온통 구멍투성이인 삶과 결연히 맞서게 하는 이 새파란 결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잘 안다. 겨울 밤, 매캐한 연탄 가스 냄새 속에서 깨어났을 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혼곤하고 혼미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우리의 육신에 생의 감각을 일깨워주던 것이 바로 한 사발의 동치미 국물이었음을. 쩡쩡 얼어붙은 정월의 밤을 허위허위 가로지르고, 하얀 눈밭을 지나 어머니가 떠다준 한 사발의 이 시린 동치미 국물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삶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나’의 어머니와 할머니와, 할머니의 할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 또한, 이 지지부진한 삶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을 때마다 차가운 동치미 국물을 훌훌 들이키는 것으로써 생의 감각을 되찾게 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삶이 동그란 동치미 무우와 살얼음 낀 국물이 가득 담긴 하나의 커다란 장독이 되는 것, 차가운 동치미 국물처럼 이 시린 생의 감각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희노애락 애오욕으로 첩첩 쌓인 삶을 거대한 하늘처럼 하나씩 어깨에 지고, 그 삶이라는 놈이 잽싸게 얼굴을 바꿀 때마다 일희일비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 생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갖 잡은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뛰노는 생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일 또한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의 몫임을. 그러하기에 생(生)은 더욱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서슬퍼런 생의 감각을 되찾고 싶은 사람, 청죽(靑竹)같은 기세로 삶에 결연히 맞서고 싶은 사람이라면, 오늘밤 이 시린 동치미 국물 한 사발을 훌훌 들이켜 볼 일이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